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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고조(高祖)를 출생했다는 유가 아닐까 싶다. 시조(始祖)는 하늘이 내린 모습의 뛰어난 임금으로 그 신성(神聖) 문무(文 武)함과 덕교(德敎) 인화(仁化)함은 비록 삼대의 성군(聖君)이라도 그보다 더 지나 칠 수 없었다. 오체(五體)가 흩어져 떨어져 오릉에 각기 장례했다는 설 에 이르러서 는 허 탄하여 결코 그럴 이치가 없는 것이다. 아, 시조는 지극히 정대한 신성한 임금이었으니 어찌 승하하는 날 괴탄한 일이 일어나 백성들을 놀라게 하였겠는가? 동경기(東京記)에 승천했다고 말한 것 은 대 낮에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 아니라 승하(昇遐)했다는 일컬음이요 7일 만 에 오 체가 흩어져 떨어졌다고 말한 것은 왕이 훙하고 왕비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잘못 말한 것이요 시조와 왕비를 합장하려고 했으나 뱀의 이변이 있어서 장례 했다는 말이요 오릉(五陵)이라고 말한 것은 왕과 왕비 두 성인의 능에다가 남해(南 解) 유 리(儒理) 파사(婆娑) 세 왕의 능을 후세 사람이 합쳐서 오릉이라고 부른 것으로 마치 한(漢)나라의 오릉과 같게 부른 것이 틀림없다. 권이진(權以鎭)의 변론 이 이 치에 합당하지 못하고 고령(高靈) 박민효(朴敏孝)가 변론한 오릉설(五陵設 )이 아 주 식견이 있기 때문에 아래에 부록하여 참고에 대비한다. ※ 신라시조왕릉전도(新羅始祖王陵全圖) 시조왕(始祖王)은 경주(慶州)에 도읍하여 재위(在位) 61년이었다. 승하하여 오릉 (五陵)에 장례하였는데 오릉은 경주부 남 쪽 오리 지점 담암사(曇巖寺) 옆 남정(南 亭) 숲속에 있다. 사당은 졍주부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있는데 묘호(廟號)는 숭덕전(崇德殿 )이다. 숭덕전의 전참봉(前參奉) 박태운(朴泰運)이 왕릉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왔 기 때 문에 옮겨 그리고, 오릉의 제도와 좌향(坐向)을 논하는 오릉변(五陵辨)을 지었는 데 변론한 후세 사람이 많아서 이미 아래에 간행하면서 자기 뜻을 붙였으니 서로 참고하여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