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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이니 어찌 무력으로 이르게 한 백랑이나 완마에 비교할 바이겠는가? 서 려(西旅) 의 개 〔 獒 〕 나 월상(越裳)의 꿩 〔 雉 〕 그 어느 것인들 덕 물(德物)이 아니 겠는가, 옥저가 말을 바친 것도 그와 같은 것이라 하겠다. 대범 성인이 사람을 감복시키는 것은 군사력이나 지모(智謀)로 하는 것보다 는 덕 교(德敎)와 예양(禮讓)으로 심복(心腹)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지난 시조왕 때에 왜구(倭寇)가 그 냥 돌아간 일이나 변 한(弁韓)이 항복해 온 것, 낙랑(樂 浪) 사 람들이 군사를 철수시킨 것과 옥저(沃沮) 사람들이 국교를 청해 온 것은 본 디 왕 의 덕교(德敎)가 펼쳐져 먼 곳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켜 그렇게 한 것이지 언제 군사를 동원하거나 꾀를 써서 그렇게 한 적이 있었던가? 시조왕이 임금 자리에 계신 60년 동안 무비(武備)를 갖추지 않아서 백성들은 전쟁을 모르고 변경 에서는 전쟁을 알리는 경보(警報)가 없어 평화로운 정치가 행해져 후세에도 이런 적이 없었다. ○갑자(甲子) 61년-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3월 왕께서 훙(薨)하였다. 그 7일 후 왕비 알영(閼英)도 훙하고 태자(太子)남 해(南海)가 즉위해서 호(號)를 차차웅 (次次雄), 혹은 자충(慈充)이라고 하였다.-차차웅이란 말은 방언(方言)으로 무당이 란 뜻이며 세상 사람들이 무당을 자충이라 하였는데 그들은 귀신을 섬기기 때문 에 존경을 받아 마침내 높은 자의 칭호가 자충된 것이다.-남해왕은 카가 크 고 성 품이 침착 관후했으며 지략(智略)이 많았다. 시조왕을 오릉(五陵)에 장사지 냈다. ○《동경기(東京記)》p는 이렇게 되어 있다. 시조왕의 능(陵)은 담운사( 曇雲寺) 옆 궁금전시(宮禁田柴)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왕이 승천(昇天)하신 7일 만에 오체(五體)가 땅으로 떨어져 나라 사람들이 합장(合葬)시키려고 하자 뱀이 요사 (妖邪)를 부려 각각 장사지내고 마침내 오 를 오릉(五陵)이라 하였는데 사릉 (蛇陵) 이라고도 한다. ○《동경지간설(東京誌刊說)》-권이진(權以鎭)이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 을 때 지었다.-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