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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께서 즉위한 이래 인사(人事)가 닦이고 천시(天時)가 조화로와 창고에 곡식이 가득차고 백성들이 서 로 존경하고 양보합니다. 그래서 진한과 변 한, 낙랑( 樂浪)과 왜인(倭人)들이 모두 두려워하는데도 우리 왕께서 겸손하게 저를 보내 이처 럼 수 교하게 하시니, 지나친 예를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 노하여 군 사로써 위협하시는 것은 왜입니까?”라고 하였다. 마한 왕이 더욱 노하자 좌우 신 하들이 말려 이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호공(瓠公)은 본래 왜인(倭人)인데 바 가지를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이라 하였다. ○임인(壬寅) 39년-홍가(鴻嘉) 2년 고구려 유리왕(琉璃王) 원년-봄, 마한 왕(馬韓 王)이 졸(卒)하였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말하기를 “마한 왕이 전에 우리 사신(使 臣)을 욕보였으니, 지금 그 임금의 초상을 당해 정벌하면 그 나라를 평정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다른 사람의 불행(不幸)을 다 행스럽 게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幸人之災 不仁也〕”라 하고는 사신을 보내 조위 (弔慰)하였다. ○사씨(史氏)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다른 나라에 초상(初喪)이 나면 그 나라를 정벌하지 않았으니, 정 벌하면 어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전 등(滕)나라 소공(昭公) 임금이 죽은 후 3개 월 뒤 송(宋)나라가 등나라를 포위하자 춘추(春秋)에서 이를 비난하였고, 진(晉)나 라 사 개(士匃)가 제(薺)나라를 침범하면서 곡(穀)지방에 이르러 제나라 임금이 죽었다 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철수해 돌아가자 춘추에서 이 사실을 크게 기록해 칭찬하였다. 지금 시조가 전일의 분노심을 버리고 이웃나라의 초상을 안타깝게 여겨서 침략하 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신을 보내 조문까지 하였으니 이른바 분노 때문 에 의 (義)를 버리지 않고 노여움 때문에 예(禮)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어질고 관대 하다는 것이다. 대저 나라를 세운 임금의 자손들은 마땅히 이를 본받아 후 세 천 백 년까지 충후함을 유지한 것은 어찌 오늘 시조가 훌륭한 계책을 물려주 어서가 아니겠는가? 삼가 상고하건대, 분은 다스리기가 어렵고 노여움을 참기란 어려운 것이다 . 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