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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록(遡源錄) 서문(序文) 소원록(遡源錄)은 왜 지었는가? 앞서 백세 이상 전의 일은 징험할 만한 문헌(文 獻)이 없으나, 마땅히 이에서 징험해야 하고, 뒤의 백세 이후에 자세하지 못 한 원 류(原流)는 마땅히 이에서 취해 상고(詳考)해야 하니, 그렇게 하 면 거의 기송(杞 宋)은 징험할 만한 문헌(文獻)이 부족하다는 탄식이 없을 것이다. 이는 누구의 공로인가? 종인(宗人) 세욱(世旭)은 송당선생(松堂先生)의 후 손인데 옛날 일에 느끼고 지 금 일에 마음이 아파서 이 소원록(遡源錄)을 지어가지 고 와 서 병으로 칩거(蟄居)하고 있는 나에게 보여주고 인하여 서문(序文)을 청 하였다. 나는 성조(聖祖)의 후손으로 비록 과문(寡聞)하고 식견이 부족한데다가 나이 가 많 고 병이 위독하지만 이는 위선(爲先)의 일 과 관계되는데 어찌 반드시 굳이 사양 하겠는가. 이에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손을 씻고 나 서 삼가 소원록을 살펴보니, 성조 께서는 하늘이 낸 신성(神聖)이신데 오랫동안 높이 받드는 성대한 전례(典禮)가 빠 져있었 다. 그러다가 당저(當宁) 27년 신미(辛未)에 족숙(族叔) 전(前) 승지(承旨) 필정(弼 正) 씨가 창도(倡導)하여 진신장보(縉紳章甫) 수백 명을 이끌고 처음으로 궁 궐 문 에 나아가 호소하자 임금께서 임어하시어 심지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 하라고 하셨다. 그때 대신(大臣)의 계품(啓稟)을 인하여 윤허(允許)를 입어 한결같이 숭인전(崇仁殿)과 숭의전(崇義殿) 두 절목(節目)에 의해 거행하도 록 한 자는 봉조하(奉朝賀) 김재로(金在魯) 공이었고, 임금의 명을 받들어 아름다 운 자 취를 발휘(發揮)하고 아름다운 명을 찬양하여 묘도(墓道) 비문(碑文)을 지은 자는 고(故) 태학사(太學士) 조관빈(趙觀彬) 공이었으며 이보다 앞선 병인년(丙 寅年)에 영남(嶺南)을 안절(按節)하고 조정에 장청(狀請)하여 능전(陵殿)의 범절( 凡節)을 일절 아울러 개수(改修)한 자는 지금의 영의정(領議政) 김상로(金尙魯)공인 데 만 약 성조(聖祖)의 지극히 인후(仁厚)한 은택이 아니라면 상하 수천 년 동안 사람들 이 지금까지 추모함이 어떻게 이에 이를 수 있겠는가? 시경(詩經) 주송(周 頌)에서 이른바”아아, 전왕을 잊지 못하겠네〔前王不忘〕”라고 한 것이 이런 경우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