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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비빔면과아비규환 나는 학교에서 지하철로 15분 거리에 살고 있어서 방송국 사람들이 우리 집에 자 주 드나들었다. 95년 6월, 동기 아나운서 진아와 37기 아나운서 승준 형, 38기 피디 진 탁 형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점심 때가 지난 뒤라 찬장을 뒤졌는데 먹을 거라곤 비빔면 두 개 밖에 없는 것이었 다. 배가 몹시 고팠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거라도 나눠먹어야 했다. 나는 비빔면을 끓였다.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두 손으로 비벼도 무방하다는 비빔면이 었지만, 양이많아보이게비빌수는없는모양이었다. 터무니없이 양이 작아 보이는 그릇 안으로 젓가락들이 달려들었다. 두 개의 라면 을 넷이서 나누어 먹는 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엉키는 젓가락을 바삐 쳐내 며 한 가닥이라도 더 먹어 보려는 필사의 손놀림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 전쟁 같은와중에진탁형이비빔면을입에가득물고이렇게말했다. “미와야, 이거 두 개 끈 거 마자?(미화야, 이거두개끓인거맞아?) 하나 뺑 거 아 야?(하나빼돌린거아니야?)” 진탁 형은 아무래도 의심스럽다는 듯이 큰 눈을 껌벅였고, 내가 두 개가 틀림없다 고일축하자, 실망스런표정으로남은비빔면에열중했다. 웃음이많은진아는웃다가 잠시 사레가 들렀고, 그러거나 말거나 일생이 정확하고 냉철한 승준 형은“한 개는 아 니야”라고 신속 정확한 판정을 했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진 우리들의 비빔면 흡입시 간. 오래지 않아 그릇은 바닥을 보였고, 진탁 형은 못내 아쉬웠는지 물 한 컵을 더 들 이켰다. 그렇게허무하게식사를끝내고할일이없어진우리는잠시후TV를켰다. 그런데, 그러고나서3초후를나는지금까지잊지못한다. TV 화면이 갑자기 속보로 바뀌더니,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우린 진짜 아비규환을 만나고 말았다. 강남 한복판에서 백화점이 통째로 무너졌고, 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건물 잔해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너무 놀라 다들 멍하니 TV만 보고 기별 Essay |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