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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당박선생(啞堂朴先生) 약사(略史) 諱는 調(조)요, 字는 愼翁(신옹)이며, 號는 啞堂(아당)이다. 松隱先生의 第三子로 高麗 忠定王2년(1350년) 庚寅 6월 18일에 밀양군 삽포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天資(천자)가 穎悟(영오)하고 氣像(기상)이 峻整(준정)하여 더벅머리 시젉부터 성인과 같았다. 成長하여 伯兄(백형)인 憂堂(우당)과 仲兄(중형)인 忍堂(인당), 아우인 拙堂(졸당)과 함께 圃隱先生(포은선생)의 門下(문하)에서 배워 크게 成就(성취)하니 朴門(박문)의 四鳳(사봉)이라 稱(칭)하였다. 先生(선생)은 일찌기 家庭敎訓(가정교훈)에 젖어 爲巳(위사)하는 學問(학문)이 있었고 자라서 圃隱先生(포은선생)을 師事(사사)하자 性理學(성리학)을 硏究(연구)하여 깊이 精微(정미)한데까지 이르자 圃隱先生(포은선생)이 造詣(조예)가 高明(고명)함을 認許(인허)하였다. 형제 4인이 나란히 講學(강학)하면서 和悅(화열)하고 湛樂(담락)하니 卞春堂(변춘당), 春亭(춘정), 成獨谷(성독곡)과 여러 賢士(현사)가 그 堂(당)을 일컬어 "四友堂(사우당)"이라하고 모두 贈詩(증시)가 있셨으며 道義(도의)로서 사귀었고 詩文(시문)을 주고 받기도 하였다. 孝行(효행)으로 薦擧(천거)되어 禮曹正郞(예조정랑)의 벼슬에 올랐으나, 이는 松隱先生(송은선생)이 네 아들에게 遺言(유언)하여 "王氏(왕씨)를 위한 守節(수절)과 李氏(이씨)를 臣事(신사)함은 先天後天(선천후천)의 의리가 다르다." 하였기로 李氏朝廷(이씨조정)에 臣事(신사)하였지만 오히려 王氏(왕씨)의 朝廷(조정)에 연연하여 一生(일생)동안 잊지 못하는 悲哀(비애)가 있었다. 승진에 애탁하지 않았으니 이는 어버이와 스승에게서 배워 얻은바 있음이다. 病(병)을 빙자하여 辭職(사직)하고 돌아오자 다시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두지 않고 聖賢(성현)의 學問(학문)에 潛心(잠심)하였다. 일찌기 自寬詩(자관시)를 지어 "天心(천심)은 厚(후)하고 薄(박)함이 없어 그늘진 골짜기에도 봄볕이 든다."라니 卞春亭(변춘정)이 嘆賞(탄상)하기를 "스스로 기대함이 이와같은지고 하였다." 또 成獨谷(성독곡)의 贈四友堂詩(증사우당시)에 화답하기를 "묵은 소원은 찬구름 남으로 가는 날이요. 붉은 마음 샛별처럼 北斗七星(북두칠성)에 지리라." 했으니 가히 忠君愛國(충군애국)하는 心情(심정)이 돈독하여 비록 江湖(강호)에 退老(퇴로)해도 朝堂(조당)의 근심을 잊지 않았음을 볼수 있다. 晩年(만년)에 憂堂(우당), 忍堂(인당) 두 兄(형)이 世上(세상)을 뜨자 아우인 拙堂(졸당)과 더불어 慶尙右道(경상우도)에 卜居(복거)하니 선생의 寓居(우거)는 宜寧(의령)의 朴嶺(박령)이고 拙堂(졸당)의 寓居(우거)는 三嘉(삼가)의 松旨川(송지천)이다. 세종13년(1431) 辛亥(신해) 10월2일에 卒(졸)하니 享壽(향수)가 82였다. 晉陽郡(진양군) 集賢面(집현면) 長興里(장흥리) 繡衣谷(수의곡) 子坐原(자좌원)에 安葬(안장)하였다. 헌종5년 己亥(기해)에 丹城(단성)의 儒林(유림)들이 선생을 新溪書院(신계서원)에 配享(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