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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天翊)은 셋 조정을 두루 섬겼고 나라 일에도 밝고 부지런했습니다. 공(功)이 북쪽 변경에 뚜렸하고, 죽을 때까지 대의(大義)를 잡아서 충신록(忠臣錄)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대절(大節)을 세움이 이와같이 밝고 빛났습니다. 바라옵건대 곧 구중궁월(九重宮闕)의 들어심을 통하여서 두글자(諡號)의 추증(追贈)을 얻게 하시오면 천만다행이겠사옵니다.』 하였으며, 또 묘소(墓所)에 고유(告由)한 글에서는 『웃음에 머금고 의(義)를 취(取)하였으니, 명절(名節)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같았다. 절의(節義)는 충숙(忠肅)으로 우뚝하였고, 덕화(德化)는 온 나라에 흡족(洽足)하였네.』 하였다. 방촌황공(厖村黃公:방촌, 황희 대감)이 『묘표(墓表)』를 지었고, 황보충정공(皇甫忠定公:황보인 대감의 시호)은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속찬(續撰)』 하였으며, 삼족당김공(三足堂金公:김대유 선생의 호)은 또 『유사(遺事)의 후서(後書)』를 지었으니, 이것은 모두 제현(諸賢:위의 글을 쓰신 분들)들이 남긴 문집(文集)을 조사(調査)하면 고증(考證)할 수 있다. 아!승국(勝國:고려)말 공양왕(恭讓王)때쯤, 적자(嫡子)를 폐위(廢位)하는 변고(變故)가 있었고, 당위(黨僞:붕당을 위해 거짓으로 꾸며냄)와 지목(指目:사람이 어떠 어떠하다고 이미 가리켜 정함)이 있어서,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