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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붉은 띠를 사용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저고리의 품이나 소매의 길이, 치마의 폭과 길이도 불편하지 않게 넉 넉한 편이다 15)신은 가죽신인 혜(群)를 신고 있는데 흰색, 혹 은 붉은색이나 푸른색의 것들이 보여 색깔을 곁들인 선발도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인들의 머리는 좌우 귀 옆에서 둥근 고리를 이루도록 묶은 소녀쌍환계(少女꼈뚫 똘)나 고리를 만들지 않고 묶기만 한 수련계(휩賴)를 하고 있다 16) 머리 윗부분에는 서로 다른 꽃모양 장식을 하였다. 그런데 머리를 양옆에서 묶거나 고리모양으로 묶는 방법은 고구려의 덕홍리 벽화고분 전실 북벽 좌우에 그려져 있는 마부들(圖16,1꺼, 수 산리 벽화고분의 곡예도(圖18), 일본의 성되태자 및 2왕자상(聖德太子及二王子像)(圖19), 당대(居代)의 돈황 17굴에 그려져 있는 수하여인도(樹下女A圖)(圖20)와 돈황 130굴의 도독부인태원왕씨예불도(都督夫A太原王E서웹%圖)(圖21) 등의 예들에서 보듯이 고대 한 · 중 · 일 3국에서 유행하였던 헤어스타일인 것이다.17) 아마도 본래는 좌우 귀 옆으 로 머리를 늘어뜨려 중간에서 묶는 방식을 따르다가 당대에 이르러 고리모양을 이루 도록 묶는 방식으로 변화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아무튼 이러한 고식의 머리모양이 박 익 묘의 벽화에 등장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회전(悔前)이 1350년에 그린 「미룩하 생경변상도(쐐刺下生經變相圖)J 의 하단에 그려진 소녀들의 예에서 보듯이 고려 후기 의 불교회화에서 볼 수 있는 속세의 여인들 중에 이러한 머리모양을 한 예들이 간혹 보이는 것을 감안하면 고대의 이 머리모양이 고려를 거쳐 조선초기까지도 이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圖22).18) 그런데 이러한 머리모양은 고대의 경우에는 대개 결혼전의 어린 동자나 나이어린 소녀들이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앞에 언급한 덕흥리벽화고분중 의 마부들과 수산리벽화고분의 독예도 중에서 죽마(竹馬)를 타는 인불, 성덕태자급 2왕 자상 중에서 중앙의 좌우에 서 있는 2왕자들이 모두 소년들이면서 수련계나 소녀쌍환 계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대에는 이 머리모양을 동자들도 했었음이 분명하다(圖1 15) 박익 묘 벽화에 그려진 인물틀의 복식에 대한 고찰은 김영재, 「박익 묘 벽화에 나타난 복식연구J , 「鏡服文化」 제4권 4호(2001, 10), pp.5-11 참조 16) 김영재, 상게논문; 黃能짧 · 陳뼈뼈, 『中華l혈代服~ílj활術J (中國旅遊出版社, 1999), p.239; 何建國外 編 r홈代源女髮뿔J (香港 審美有限公司, 198끼, pp.54,55 참조 17) 덕흥리벽화고분의 마부상들과 수산리벽화고분의 곡예도는 『북한의 문화재와 문화유적J 1, 圖 211,212,239; r성덕태자 및 2왕자상」 은 안휘준, r한국 회화의 이해J , 圖29 및 「한국 회화사 연 구J pp.103 -108; 돈황의 그림들은 『中國폈煙탤畵展J (東京:每日新閒社, 198징), 圖4 및 37 참조 18) 李東써1, r高麗佛畵J , 韓國의 美7, (中央日 報社, 1987), 圖5의 하단부분 참조. 1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