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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벽화이다 2)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산 l34번지에 소재하는 이 고분은 당시 에 몰려온 태풍 사오마이로 인하여, 이미 1987년경 도굴되었던 무덤의 봉분이 내려 앉 게 되어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벽화가 그려져 있음이 확인되었고, 문화재청과 동 아대학교박물관의 공동발굴을 통하여 지석이 수습됨으로써 묘주와 절대연대가 명확하 게 확인되었다. 지석에는 “朝奉大夫 司宰少藍 朴翊幕 長子風 二子昭 三子所 며子맴 長· 女適孫꽃 二女適曺功顯 三女適孫憶 永樂 康子 二月 甲寅舞”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 다 이 지석의 멍문에 의해서 이 무텀이 조봉대부로 궁중의 식품을 관리하는 현대의 차관급에 해당되는 사재소감의 벼슬을 지낸 박익의 것이고 그는 4남 3녀를 두었으며 1420년(세종2년)에 이 무텀에 묻혔음이 분명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즉 묘주와 묘의 절 대연대가 함께 확인됨으로써 이 무덤의 벽화가 지닌 사료적 가치가 더없이 막중하게 되었다 그런데 박익이 사망한 것은 l398년이고 이 무덤에 묻힌 연대는 1420년이어서 사후 32년만에 이 무덤에 안장되었음도 알 수 있다. 즉 묘주인 박익이 활동했던 것은 고려말이고 그가 이 무덤에 묻힌 것은 조선왕조 초기여서 이 무덤은 여말선초의 문물 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가 되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 무텀이 지니고 있는 정보는 여말선초 우리나라의 회화는 물론 복식, 민속, 묘제(幕制), 종교 등 여러 분야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특히 묘주인 송은(松隱) 박익은 고려말의 대표적인 충신이자 문짱가로 본관이 밀성 (密城)이며 예부시랑과 사재도감을 지냈고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 등과 함 께 8은(八隱)중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중요한 인물이어서 그의 무덤 벽화가 지난 문화 사적 의미는 각별하다고 생각된다,3) 이러한 의미에서 이 무덤의 벽화가 보여 주는 내 용과 화풍에 대한 고찰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2) 박익 묘 벽화의 발견에 관해서는 2C뼈년 9월 21일부터 22일에 걸쳐 서울의 주요 일간지들에 원색 사진들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독자들의 관심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 3) 박익의 행적과 사람됨은 그의 문집에 실린 행장(行狀), 실적(實隨), 유사{遺事) 등에 자세히 기록되 어 있다 r國譯 松隱先生文集J (密陽:報本짧, 1999), pp.265-374참조 • 1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