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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확인할 수 없다. 세종 7년에는 成均館 司활〈정4품)로서 文蘭에서 釋쫓을 드리고 사신을 접대한 바 있으며,61) 이후의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誌Æ에서 박익을 장사지낸 해라고 하는 세종 2년은 박융이 직첩을 돌려받은지 2년 정도 되는 시기이다. 직첩을 돌려받아 곧 복직되었다면 그가 관료로 활풍하는 동안에 부친상을 당한 셈이 된다. 세종 5년 5월 박융이 강원도경차관으로 나갈 때, 그는 이미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있었다 이조정랑에 있으면서 경차관으로 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이조정랑을 받기 전에 다른 관직을 역임했을 가능성도 있다 즉, 직첩을 될려받은 가까 운 어느 시기에 복직되어 다른 관직을 역임하다가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고 볼 수 있 다 그것은 이조정랑이 정5품직이라는 점에서, 직첩을 회수당할 때 종5품의 판관에 있 었던 그를 복직시키면서 바로 승진시켜 임명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박융은 세종 2년에서 5년 사이에 관료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면 세종 2년에 박융이 부친상을 당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 다. 상중에 있었으면 탈상때까지 관료로 활동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따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볼 때, 박익의 사망은 황희의 基表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정종1년(1398)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종 1년 박익이 사망했을 때 그 묘는 부 인 성주배씨와 合封으로 조성되었다. 정종 1년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 遺~:2:에 대한 복 권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무덤을 크게 조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 나 태종대 이후 정몽주를 비롯하여 고려에 절의를 지킨 인물들이 새롭게 평가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는 태종대에 개국공신세력을 일정하게 부정하면서 권 근, 하륜 등 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인물들을 둥용했던 정책 방향과도 연관되는 것 이다 62) 조선 건국과정에 숙청되었거나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들을 재평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당시 중견 관직에서 활동하고 있던 박융은 비로소 아버 지 박익의 무텀을 새롭게 단장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아마 改賽에 가까운 것 이기 때문에,63) 이 해에 장사지냈다는 내용으로 誌石을 만들어 奉安했을 것으로 보인다. 61) r세종실록』 권 29, 세종 7년 8월 정묘 62) 류주희, r조선초 비개국파 유신의 정치적 동향」, 『역사와 현실~ 29, 1998, 61 -65쪽 63) 박익묘의 발굴과정에서 A骨을 조사했던 동아대학교 김재현교수의 따言애 따르면, 인골은 키가 152cm, 나이는 60 여세 정도였다 하고,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어서 移蘇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 다고 한다 보다 정밀한 조사가 요구되지만, 移拜이 아니라 하더라도 본래의 장소에서 봉분의 개축 등 새롭게 조성할 수는 있을 것이다. 1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