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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처리해나가는 과정에서 이성계파가 왕조교체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게 되자 공양왕이 차츰 이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공양왕은 이색 등을 주살하자는 대간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면하고 있으며, 이후에도 정도전 · 남은 등 이성계파의 탄핵 활동을 저지하고, 대신에 정도전에 대한 탄핵은 받아들이는 등 이성계파의 입장과 일 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41) 이는 왕조교체를 추진하려는 이성계파의 의도를 공양왕 이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윤이 · 이초 사건은 공양왕 옹립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세력집단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심 인물은 정몽주였다. 공양왕 2년 8 월, 사헌부와 형조가 윤이 · 이초의 당여를 치죄할 것을 요청했을 때 공양왕은 이를 도 당에서 논의케 했는데, 정몽주는 ‘죄가 명백하지 않고, 또한 이미 사면을 받았기 때문 에 다시 논죄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어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42) 위화도 회군에서 공양왕 옹립에 이르기까지는 정도전 등과 함께 정치적 노선을 같이해 왔던 정몽주는 이성계파가 왕조교체를 가시화 시켜가자 세력집단에서 이탈하여 고펴왕조를 유지시키 려는 세력집단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정몽주와 입장을 같이하면서 조선건국에 반대했던 세력집단에는 權遇 · 許應 · 金廳 · 李行 · 李I擔 · 成石짧 등 많은 인물들이 포함되고 있었다,43) 이들은 정몽주가 守 門下待中에 임명되는 공양왕 2년말부터44) 왕의 지원을 받으면서 정도전 등 조선건국 주도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펴기 시작하였다. 먼저 이성계파로 활동하고 있던 尹紹宗 · 吳思忠 · 南在 등을 대간직에서 교체하거나 좌천시키고, 공양왕 3년(1391) 9월 에는 정도전과 趙따을 유배보내고 있다. 이렇게 정국이 일변하게 되자 박익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예조판서를 맡아 정치활동 을 재개한다 그의 귀경은 정몽주와 이색의 권유에서였던 것 같다 박익이 낙향해 있는 동안 정몽주와 이색은 직접 밀양을 방문하여 복직을 권유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정몽 주와의 만남은 다음과 같은 시문에서 확인된다. 41) 趙량橋, 앞의 글, 455-456쪽 42) ['高麗史節要』 권 34, 공양왕 2년 8월 43) 李亨雨, 앞의 글, 90-95쪽 劉f購, 『鄭夢周의 政治活動iliJf究~, 이화여대박사학위논문, 1996, 14 1 - 144쪽 〈표13-1> 정몽주의 핵심집단 및 〈표13-2> 정몽주의 동조집단‘ 44) ['高麗史」 권 45, 世家 45, 공양왕 2년 11월 갑오. - 1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