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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 左代言(정3품), 知申事(정3품)를 역임하였고, 王康은 우왕 12년에 成均察뼈(종3품) 를 역임한 바 있다 박익의 동경판관은 이들에도 미치지 못하는 관직이었다 물론 과거에 합격했다고 해서 모두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승진의 기회가 같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문별 출신일수록 진출에는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박익의 승진 과정은 매우 느린 것이었다 승진이 늦었다는 사실과 관 련하여, 몇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늦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그 까닭은 과거 합격 후 初職을 받은 시점이 늦었거나, 아니변 하위 관직을 역임할 때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을 수도 있으며, 가문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만일 정상적인 경로로 우왕 12년에 동경판관이 되었다면 과거에 합격한 시기 와 初職을 받은 시기가 공민왕 말 우왕초일 것인데, 이렇게 되면 박익이 과거에 합격 할 때의 나이가 이미 40세를 넘긴 시점이23) 될 것이다. 박익이 동경판관을 역임하기 이전 어떤 관직을 역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공민왕대 부터 이 시기까지는 중하위 관직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 구체적인 官路를 확 인할 수 없다 여러 해 동안 지방관을 역임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뒤에 司宰少藍과 禮 部議郞을 역임한 것과 관련지워 보면, 司宰춤를 비롯한 여러 춤와 뽑, 피뿔훌E를 비롯한 6 部의 하위직에서 경력을 쌓았을 수도 있다 지방관으로서 동경판관 보다 낮은 관직으 로는 각 那縣의 뭄Ij使 · 냈쩍 · 縣폐와 司視參軍事를 비롯한 屬官이 있따.24) 諸춤에는 少 藍 밑으로는 부서에 따라 다르지만 司宰좋의 경우 후(종6품)과 注演(종7품)이 있으며, 諸뽑에는 令(종8품)과 캘(종9품)이 있었다. 6部에서 5품 이하의 관직으로는 員外郞(정6 품)이 있었고 페部의 경우는 律學博士(종8품)와 助敎(종9품)가 있었다. 박익은 이상과 같은 하위직을 거치면서 우왕 12년 동경판관에 재임했을 것으로 보인 다. 특히 지방관을 주로 역임했을 가능성이 있다. 박익은 왜구 토벌에도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지방관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였던 것같다 왜구는 고종 10 년부터 고려말까지 529회에 걸쳐 침입했던 것으로 집계되는데, 우왕대에만 침입한 전 체 회수의 반을 훨씬 넘는 378회에 이르고 있다.25) 지역적으로는 전체 472회 가운데 23) 지금까지 조사된 바로는 고려시대 과거합격자 가운데 고령은 39세였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박용운, 앞의 책, 303쪽 24) ~고려사』 권 77, 지 31, 백관 2, 外I服 25) 나종우, r홍건적과 왜구」, 「한국사~ 20, 1994, 396 - 397쪽 1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