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page

흙浦椰이었던 級浦는 논농사에 적합한 촌락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의 기 록이지만 級浦가 속해 있던 府北面에는 興防提, 春奇提, 大項提, 陽也提 등 4개의 t훌t뽑 이 설치되어 있었다 12) 당시 밀양에 모두 9개의 提塊이 있었는데, 반 가량이 府北面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같은 규모의 提樞이 이곳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고려시대 이래 저수지로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i 그만큼 다른 지역에 비해 논농사에 유리했을 것이다. 박익은 바로 이같은 입지조건을 갖춘 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물 론 박익은 밀양이 아니라, 다른 지역, 특히 수도인 開京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족보나 黃喜가 지은 ’養表’에 따르면 아버지 永均은 版圖判똘를, 할아버지 幹은 平章事를 역임하였다 하여,13) 일찍이 그의 선대부터 고급관료를 배출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박익의 가문은 이미 上京從{士하여 관료가문이 되었 을 뿐만 아니라, 문벌의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박익의 私第는 이미 수도 또는 그 인근에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고, 박익 또한 그곳에 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朴幹과 朴永均이 이같은 고위 관직을 역임한 사례는 史書 어느 곳에서도 찾 을 수 없다 朴永均이 역임했다고 하는 版圖判書는 정3품의 고위직이고, 특히 朴幹의 平章事는 정2품의 宰相I熾에 해당한다. 이 정도의 관직을 역임한 인물이라면, 그 승진과 정이나 활동내용이 사서에 편린이라도 언급될 법한데, 전혀 찾아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들이 실제 이들 관직을 역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급관직에 머물렀든 지, 아니면 아직 관료로 진출하지 못하고 밀양의 재지세력으로 남아 있었을 것 같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박익은 밀양 柳第에서 태어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박익은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원간업기라는 사회현실 속에서 보냈다 고려가 장기간 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 끝에 원에 종속된 지 50 여년이 경과하고 있었던 충숙왕 복위 년(1332)에 태어나, 공민왕 5년(1356) 반원정치로 원 간섭이 종식되는 25세까지 원간섭 기를 보냈던 것이다. 박익이 고향 밀양에서 관료생활을 준비하고 있던 당시 중앙정계 는 원의 종속구조가 자리잡게 되면서 중서문하성-6부체제로 유지되어 왔던 정치기구 12) Ii'與꽤圖書』 경상도 大lÍ.鎭管密、陽都護府 提樞 13) r公系出新羅始祖!Iffl;居世 祖前朝平章事 我當수朝追U홉fi.ri¥k寧 論良孝公응후幹 父前朝版圖判書銀山府 |양君 論文憲公 我當수’朝追體領相홉永均J (r松隱先生X集J 권 2, 훌表) -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