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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소 일본군의 직접 통제하에 조직적으로 설치된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는 1932년 초 중국 상해의 해군위안소로 알려져 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전장을 확대해가는 중에 난징 민간인 대학살이 발생하였고, 이 과정에서 현지 여성들에 대한 강간이 대대적으로 자행되자 강간방지와 일본군의 성적 욕구 해결을 통한 사기진작, 만연한 성병방지로 군사력 유지 등을 위해 군위안소를 확대하여 광범위하게 조직적으로 설치하게 된다. 일본군 위안소는 중국, 대만, 필리민, 싱가폴, 미얀마, 인도네시아, 태평양의 많은 섬 등 전쟁기간 중 일본군이 주둔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존재하였으며 일본군의 전쟁경로를 따라 설치되고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위안소는 군이 직접 설립, 운영하였으며 민간에게 위탁하는 형태도 있었다. 민간이 운영하는 위안소는 군대의 보호, 감독 및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위안소는 군에서 제정한 '위안소 이용규칙'에 따라 통제되어 운영되었는데, 규칙에는 군인을 상대하는 시간과 군인의 숫자, 요금, 성병검진, 위생 상태 등에 대해 세세하게 적혀있다. 위안소의 규칙에는 사용시간에 따라 계급별로 '위안부'에게 돈이나 군표를 지불하도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 '위안부'에 대한 사용요금의 지불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위안부'들은 이러한 규칙과 상관엇이 수많은 군인을 상대해야 했으며 군인들의 요구를 거부하면 폭언과 구타, 고문 등 폭력의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탈출을 시도하거나 임신을 했을 경우에는 살해되기도 했다는 사실이 피해여성들의 증언을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일본 군의관들이 일본군 '위안부'들에 대한 건강검진을 주1회 정도 하였으나 이 검진은 피해여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성병감염을 막기 위한 군인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위안소 건물의 형태는 군이 새롭게 짓거나 점거물, 임시구조물이었고 건물을 대여하기도 했으며 전방의 위안소는 텐트이거나 임시 목조 오두막 등이었다. 위안소는 주로 철조망에 둘러싸여 철저하게 차단, 감시되었으며 행동과 외출이 제한되어 동원된 여성들은 감금상태에 처한 성노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