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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8월31일 목요일 7 (제128호) 관향조 종친회 1579년 태어나 1602년 무과에 급제하여 무신(戊申,1608)에 영건권관(永建權官)이 되었고,광해군 을묘(光海君乙卯,1615) 에 옥구현감(沃溝縣監)에 부임하여 선정(善政)으로써 의비(衣 緋)를 받았고, 임술(壬戌,1622)에 창성대도호부사(昌城大都護 府使)에올랐었다. 인조 갑자(仁祖甲子,1624)에 도원수 장만(都元帥張晩)의 선 봉장(先鋒將)으로 관서(關西)에 이르렀을 때 마침 부원수 이괄 (副元帥李适)이 반기(叛旗)를 들었는데, 거느린 장수(將帥)들 이 모두 항왜용사(降倭勇士)였으므로 원수군(元帥軍)이 그 흉 한(凶悍)을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進擊)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에 홀로 싸우기를 청하여 남이흥(南以興) 정충신(鄭忠信)과 함께 각기 장병(將兵) 3000을 거느리고 황주신교(黃州薪橋)에 서 교전(交戰)하여 남 이흥(南以興) 정충신(鄭忠信)의 군사 (軍士)가 먼저 무너졌으나 충장공은 물러서지 않고 말을 달려 이괄의 진(陣)으로 들어갈 때 말이 별안간 엎어져 도리어 피금 (被擒)되었다.(위영조18년실록참조) 인조임금은 충장공의 이 사실을 듣고 병조참판에 증직하고 치제(致祭)와 정려(旌閭)로써 포창( 彰)하였고, 영조 을 묘(1735)년에 병조판서에 가증(加增)되고 충장(忠壯)의 시호 가내려지니사림(士林)들은덕봉서원충열사에봉안하였다. 후손들은 충장공파로 세계를 잇고 훗날 충남 논산으로 이거 하여집성촌을이루고있다. 의민공(휘 이현)의 넷째 윤서의 호는 수당(修堂)이다. 한강 정구 선생에게서 수학하였으며, 무예(武藝)가 뛰어나 1618년 무과에 급제하여 효력부위, 호분위, 선전관, 정략장군, 용양위 부호군,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1625년 토산현감(황해북도의 남 동부에 위치한 군),웅천현감(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남동)을 역 임하였다. 1639년 정묘년에 잠시 관직을 버리고 남쪽지방으로 돌아온 후 만대산(고령 쌍림)으로 들어가 한사 강대수,지분 강 이유, 무민 박인 등과 도의지교를 맺었으며,1634년 김해부사로 있을때는신산서원에서유생들을모아놓고학문을강론하였으 며,선정을베풀어후일유생들은송덕비를세웠다.후손들은그 의 호 수당(修堂)을 따 수당공파라 하고 성주 수륜에 세거지를 두고있다. 참봉공 휘 대영(大榮)의 차남 이립(而立, 의민공 이현의 동 생)의 호는 임수정(臨守亭)으로 문필이 뛰어나고 총명하여 소 실된 가보(家寶)를 즉석에서 암송하며 서지(書之)하여 다시 만 들었다 한다.묘는 전주 상관면(현 완주 상관면) 간좌이며 충장 공 영서께서 옥구현감 재임시에 이곳으로 반당하였다. 이후 후 손들은 임수정공파(臨守亭公派)로 세계를 잇고 경북 성주에서 전북으로이주하는계기가된듯하다. 승사랑공(휘 인손)의 차남 숙정은 지지당 김맹성의 문인으로 학문과 품행이 남달랐다.성균 생원(生員)으로 그의 아들 지(지 폴)는 숙릉참봉(고려 제9대 왕 덕종 능) 손자 한기(閑驥)는 진 사(進士)이다. 후손들은 생원공 숙정(淑楨)을 파조로 하여 생 원공파라하고경북성주군수륜면에산재해있다. 사맹공파는 의주목사공의 차남 예손(禮孫)을 파조로 한다. 사맹공의 아들 한하(漢河)는 통정대부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소학당에서 수학하여 문장과 덕망이 높았다. 그는 아들 4형제 (식, 우, 돈, 지)를 두었는데 장남 식(埴)은 진사(進士)시에 올 라 경릉(敬陵) 참봉(덕종과 소혜왕후의 능)을 지내고 손자 용 담공(휘 이장)의 귀(貴)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 고, 아들 양좌(良佐)의 호(號)는 복재(復齋)이다. 1540년 진사 가 되고,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경기전 참봉으로 학문과 덕행이 높았으며 두 아들(이문, 이장)을 두었는데 차남 이장의 귀(貴)로이조참판 홍문관제학겸세자좌부빈객에증직 되었다. 복재공(휘 양좌)의 장남 이문(而文)의 호는 남계(藍溪), 154 4년(종중39)에 태어나 뛰어난 학문으로 1568년 진사시에 합격 하였고,한강 정구 선생과 도의지교를 맺었다.지극히 효성스러 워 아버지 복재공이 병을 앓자 옷을 벗지 않고 주야로 뫼시면서 간호를 하며 동생 용담공(휘 이장)에게 ‘부모님이 늙으셨으니 벼슬은 네가 하고 나는 부모님 봉양을 맡겠다.’고 한 후 과거공 부를 그만두고 성의를 다하여 부모를 섬기므로 조정에서는 그 의 효성을 듣고 경릉참봉을 제수하였으며, 임진왜란에는 분연 히 일어나 망우당 곽재우의 진영에 있으면서 군량을 조달하였 는데 이때 학봉 김성일의 파직이 부당함을 열읍(列邑) 선비들 과 함께 상소하여 이를 막아내고,낙동강 이서지역 방위에 힘써 망우당과 학봉은 늘 그의 충절을 칭찬하였으며, 통정대부 승정 원좌승지에증직되어후손들은남계공파로합천지역에거주한 다. 복재공(휘 양좌)의 차남 이장(而章)의 호는 용담(龍潭)으로 1547년에 태어나 1573년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기자전 (箕子殿)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관혼촬요(冠婚 撮要)]를 지었다. 1586년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를 제수 받았다.한림(翰林)으로 있을 때 선조(宣祖)를 야대(夜 對)하였는데 선조가 임금의 덕(德)에 대해서 물었다. 용담은, “백성의 고락(苦樂)은 임금의 덕에 달려 있는데, 덕이란 것은 마음의도리를갖추는것입니다.사욕이그도리를덮어버릴수 있으니, 항상 존양(存養) 성찰하는 노력이 없으면 마음의 도리 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성(誠)과 경(敬) 의 요점을 이야기 했고, 성색(聲色)과 교일(驕佚)에 대한 경계 와간사한인간들이임금을막는것에대한우려등에대해서언 급했다. 또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경(敬)과 태(怠)의 관계 등에대해서도상세히이야기해주었다. 선조가 궁중의 좋은 술과 귤을 선물하고 내시들로 하여금 돌 아가는 길을 인도하라고 명하였는데,그 당시 사람들이 아주 영 광으로생각하였다. 1591년 5월 하절사(賀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 라에 갔다. 당시 왜인들이 조선 조정에 글을 보냈는데, “명나라 를 징벌하러 갈 것이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라는 내용이었 다.이런 내용을 명나라에 사실대로 알릴 것이냐 숨길 것이냐로 조정에서 논란이 있었는데, 용담은 사실대로 왜의 사정을 바로 알릴 것을 주장했다.황제가 사실대로 보고한 것을 기뻐하여 몇 수레의서적을하사했다. 1592년 1월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4월에 왜적이 대규모로 침략해오자, 창의하여 왜적을 쳤다. 용담은 향병(鄕兵)을 모아 송암(松菴) 김면(金沔), 내암 (來庵)정인홍(鄭仁弘)등과 연합하여 왜적의 흉봉(凶鋒)을 막 아 경상도 지방을 보호하였다. 가을에는 초유사(招鍮使) 김성 일(金誠一)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군무를 논의하였다. 9월에 호남(湖南)에서 군량 1천포를 가져와 경상우도 지역의 군민(軍民)들을 구제하였다.1594년 정언(正言)에 이어 순창부 사, 수원부사, 1601년 성균관 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가 한 달 여 만에 귀향하였다.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선무원종공 신(宣武原從功臣)에 모두책록되었다. 1602년 사헌부 집의에 제수된 이후로 홍문관 부응교(副應 敎),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시강원 필 선(弼善), 보덕(輔德),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 旨), 좌승지, 도승지,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이조참 의, 참판, 대호군(大護軍), 예조참판, 대사헌, 한성부(漢城府) 좌 윤 (左 尹 ) 등 직 을 역 임 했 다 . 지은 책으로는 ‘관혼촬요(冠婚撮要)’, ‘정서절요(程書節要)’, ‘육경려해(六經 련海)’, ‘심경촬요(心經撮要)’, ‘상재만록(桑梓 漫錄)’등이 있었으나 그의 서재인 ‘모덕와’가 불타는 바람에 다 없어지고말았다. 후손들은 용담공파라 하여 경남 산청 신등면 단계리에 큰 집 성촌을 이루고 있다. 사복시정(휘 한하)의 차남 우는 진사(進 士)이며 경기전 참봉으로 아들 양보, 양익 형제를 두었는데 장 남 양보의 호는 일재(逸齋),선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기자전 참봉에 제수되었고 그의 아들 이환(而煥)의 호(號)는 동호(東 湖), 종숙 복재공(復齋公, 휘 양좌)에게 수학하여 7,8세에 소학 대 학 을 통 달 하 고 1 5 세 때 경 서 를 익 혀 문 학 을 크 게 떨 쳐 세 상 사 람들은 남계공(휘 이문), 용담공(휘 이장)과 함께 삼빈군자(三 彬君子)라하였다. 선조 때 하동훈도에 임명되고 광해군 때 예조랑(禮曹郞)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후일 예조참판에 증직되고 후손 들은 그의 호 동호(東湖)를 인용 동호공파라 하고 경남 합천에 세거한다. 진 사 공 휘 우 의 차 남 양 익 ( 良 翼 )의 호 는 둔 재 ( 遯 齋 ) , 경 기 전 참봉이고, 아들 천령(千齡), 이화(而華)를 두었는데 장남 천령 의 號는 남천(藍川)으로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진사공(휘 우)에 게 수학하여 대학, 소학, 효경, 통사를 깨닫고 15세 때 사자(四 子), 육경(六經), 예기(禮記), 춘추(春秋)는 물론 무예병학(武 藝兵學)을 함께익혔다.임진왜란에 영호남 고을이 함락되자 망 우당 곽재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토적(討賊)하였다. 의주 행 재소에서그의역전전공을초유사김성일로부터전해들은선조 임금은 그를 병조참의에 제수하고 진중 모든 대소사를 함께 의 논하여 결정하라 하였다. 이후 통정대부 중추부사에 증직되어 후손들은 중추공파라 하고 경남 합천에 세거하고 있으며, 참봉 공 양익의 차남 이화는 임진란에 동지들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 여 삼등훈(三等勳)으로 수문장에 제수되고 주부(主簿)에 이르 렀다. 사복시정 한하(漢何)의 삼남 돈(墩)은 참봉이고 그의 증 손 천립(天立)은 재종숙 남천공(휘 천령)과 함께 망우당 진중 에서 토적(討賊)한 공으로 통정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되어 후손들은중추공파(中樞公派)라하고성주수륜에세거한다. 주부공파의 파조는 의주목사공 휘 유성의 삼남 신손(信孫)으 로 호(號)는 모헌(慕軒), 상서원 주부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문유(文儒)의 號는 요산(樂山)으로 생원이다. 종형 참봉공 한 삼(漢參)과 한원당 김굉필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1504년(연산 군10)갑자년에훈구사림파중심의부중세력이궁중세력에게 받은 정치적인 탄압 사건인 갑자사화가 있은 후 은둔하여 불사 (不仕)하고학문에만몰두하였다. 주부공의 손자 붕거(鵬擧, 모헌공의 아들)의 호(號)는 행단 (杏壇)으로 1543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 진사가 되어 크게 명성을 떨치고, 명종조에 요승(妖僧) 보우(普雨)가 불교를 전 파하면서거처(居處)가참람하고 막강한권력으로 교만을 부려 화(禍)가 언제미칠지헤아릴수가없으므로영남지방의 선비8 명과 함께 강력히 항쟁하여 여덟 차례나 상소하였으나 승정원 (承政院)에서저지하자대궐문까지 가서호소하여 결국윤허를 받아배척하였다. 주부공의 증손 광후(光後, 행단공의 아들)는 1533년생으로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대가천(大伽川)에 집 한 채 를 짓 고 대 나 무 와 잣 나 무 를 심 어 죽 백 당 (竹 柏 堂 )이 라 하 고 자 호 (自 號 ) 하 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종질 이현(而絢, 懿愍公)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적을 사살하고 생포하였다. 전란은 소강상 태를 보였으나적장이대병(大兵)을거느리고다시 쳐들어오자 약한 병사들은 대적할 수 없어 넘어지고 도주하나 죽백당 만큼 은 용기를 꺾지 않고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요새지를 사수하 였다. 이렇게 3년이란 세월이 흘러 1595년 2월 1일 산성(山城) 의 전투가 패배하자 결국 군중에서 순절하였는데, 이때 아들들 (자의, 자우, 자건, 자화)은 진중으로 들어가 그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는 효심을 발휘하였다. 죽백당공은 이후 가선대부 공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에증직되었다. 장남 자의(子義)는 진중에서 적군의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 했음에도 끝까지 선고(先考,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고향에 안장하고묘소를지켜떠나지않는효심을보였다. 자의(子義)의 호(號)는 심경당(心敬堂)으로 1558년 태어나 1 5 세 때 에 설 봉 박 찬 에 수 업 하 였 으 며 , 삼 익 재 이 천 배 와 백 천 이 천봉 등과 경의(經義)를 강론하였다.항상 심경(心敬)이란 두 글 자를 써놓고 경잠(擎箴)으로 삼았다.후손들은 심경당공파(心敬 堂 公派 )라 하 여 성 주 수 륜 에 산 재 해 있 다 . 심 경 당 공 의 아 들 산 립 (山立)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선무원종공신이고, 차남 동립(東 立)은 정유재란에 무과에 올라 용양위사과, 호분위정략장군 겸 선전관을거쳐상주판관및통훈대부제용감정에올랐다. 죽백당공(참판공)의 차남 자우(子羽)의 호(號)는 모와(慕 窩)이다.1562년에 태어나 10세 때 설봉 박찬에게 수업하였는데 영민함을 보여 설봉 선생으로부터 매우 사랑을 받아 일찍이 학 문의 대성을 이루었다. 임진왜란에 종자(從子) 산립(山立, 형 자의의 아들)이 전사하자 백운산성으로 달려가 그 시신을 거두 어다가 장례를 치르고 송암 김면의 막하에 머무르며 힘써 싸워 적을 토벌하였으나 적병이 습격해 올 때 주장(主將)은 병이 들 어 사망하고군영이 허물어져사졸(士卒)들이흩어지므로 다시 조승훈의 군영으로 가서 의지하며 토적(討賊)하였다. 1652년 종자동립(東立)이예조에 호소하여중추부사의 직함이내려지 고, 후손들은 모와공파(慕窩公派)로 세계를 잇고 경북 성주 수 륜에거주한다. 죽백당공(참판공)의 삼남 자건(子建)의 호(號)는 둔산(遯 山)이며 1578년생으로 통사랑이다. 성품이 평온하고 문사(文 詞 )가 숙 달 (熟 達 ) 하 여 심 원 이 육 , 사 옹 박 명 윤 등 향 리 의 제 현 사(諸賢士)들과 도의지교(道義之交)하였다. 항시 자질(子姪) 들에게 경계하기를 “궁통(窮通)은 운수가 있는 것이니 부귀(富 貴)에 급급하지 말고 빈천(貧賤)에 슬퍼하지 말라. 지신(持身) 을 독실하게 하여 가정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다.”고하였다. 후손들은 둔산공파(遯山公派)로 세계를 잇고 경북 성주 수륜 에거주한다. 죽백당공(참판공)의 사남 자화(子華)는 학생(學生)으로 천 성이 순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여 임란 에 참여한 형들을 대신하여 가정대소사에 있어 소홀함이 없이 세세히 살피고 점검하며 노고(勞苦)를 불사(不辭)하여 후손들 은학생공파(學生公派)라하고수륜에세거한다. 진사공파의 파조는 판윤공 의 차 남 휘 두 성 (斗 星 ) 으 로 약관18세에 진사시에 장원하 였다. 진사공의 아들 유산(由 山)은 통덕랑이고, 현손 응규 (應圭)의 장남 홍원(弘遠)은 의 금 부 도 사 ( 義禁府都事)에 이르고 손자세문(世文)에 이 르러 무후(无后)이고,의금부 도사 홍원의 동생 홍량(弘量, 응규의 차남)의 아들 일원(一 元)은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이다. 이에 후손들은 감찰공 파(監察公派)로 세계를 잇고 고령 쌍림에 세거한다. 이와 같이 판윤공파는 크게 4개 파로 분 파되고 다시 6~7세에 이르러 백당공파, 충장공파, 수당공파, 임 수정공파, 생원공파, 남계공파, 용담공파, 동호공파, 중추공파 (휘 천령), 중추공파(휘 천립), 심경당공파, 모와공파, 둔산공 파, 학생공파, 감찰공파 등 15개 지파로 분파되어 세계를 이루 고, 판윤공이 불사이군의 충절을 보이며 은둔한 가야산을 중심 으로 경북 성주 수륜면,고령 쌍림,경남 합천 가야면,산청 신등 면,전북진안,충남논산등지에집성촌을이루고있다. 가야산에 소재한 지동암(志同巖),장구지소(杖 넓之所),불이 문(不二門)은 고려말 개성판윤(휘 가권)이 이성계의 역성혁명 이 일어나자 은둔한 유적지이다.가야산 중턱에 자리한 이들 유 적은 고고한 생을 말해주듯 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옛 그 자 리 에있다. 지동암은 판윤공이 가야산에 들고 야은 길재 선생이 금오산 에 은둔하니 서로 뜻이 같다하여 지동암이라 하였고, 장구지소 는 짚신 신고 지팡이 집고 지동암을 오르내리실 때 이곳에서 쉬 어가며 망국지탄의 분을 삭이던 곳이며,불이문의 ‘불이(不二)’ 는 오직 하나이며 둘을 택하지 않음이니 곧 불사이군(不事二 君),즉두임금을섬기지않는다는절의를뜻함이다. 후인들은 판윤공 박가권과 길재의 충절이 백이(伯夷)·숙제 (叔齊)와 비견한다하여 두분의 절의를 높이 칭송하고 있다.장 구지소는 불이문에서 서북방향으로 약500m지점,큰 바위에 ‘高 麗開城尹竹柏里朴先生杖넓之所(고려개성윤죽백리박선생장구 지소)’란 글이 새겨져 있고, 지동암은 서북방향 3km지점 가야 산7부능선에있다. △ 죽백고택(竹栢古宅)은 판윤공이 입향한 이후 600여 년간 이어온 판윤공파의 종택이다. 가옥의 최초 건립연대는 알수 없 으나 여러 차례 보수와 개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택호 죽백은 판윤공이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남쪽으로 내려와 윤 동 마을에 입향한 이후 가옥 주위에 대나무와 잣나무 등을 많이 심어 가꾸면서 후세 사람들이 그를 죽백선생이라 불렀던 것에 서 유래된다. 고택은 조선시대 양반가의 기본적인 구성형태가 되는 사랑채와 안채 대문채, 고방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측부에도 건물이 있어 터진 ‘□’자를 이루어 안마당을 감싸고 있었을것으로추정되나현재는남아있지않다.또한안채의우 측 뒤편의 높은 축대위에 사각형의 토석담장을 돌린 일곽 내에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죽백 고택은 보수와 개축 등으로 건축물 들의 연원이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입향한 당대에 건립된 이후 600여년 동안 세거한 역사를 담고 있으며, 안채의 건너방 우측 에 퇴칸을 설치한 평면적인 특징, 살림채보다 건립연대가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 사당 문틀의 모서리 맞춤수법이나 가구수법 등에서높은문화재적가치를지니고있다. △ 덕봉서원과 성인당은 판윤공,의민공,충장공의 위업을 기 리기 위해 세웠으나 건립연대를 알수 없다.그러나 철폐령에 따 라 훼철되고 현재는 ‘성인당’이라 하여 재사(齋舍)로 사용되고 있으며,△죽백사는 판윤공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이후 의민 공 이현,충장공 영서를 추배하였으나 충장공의 위패는 논산으 로이안하여가고판윤공과의민공의위패만봉안하고있다. /글븡사진박상섭편집국장 뱚6면에서계속 판윤공의입향지수륜면윤동마을전경. ▶사맹공파(司猛公派) 소학당-경남문화재자료 제137호 경남합천군가야면매안리989 사맹공 박예손이 사위 한훤당 김굉필과 자녀들의 공부를 위해 지은학당이 다.①소학당강당②화산사(남계박이문을비롯한 안동권씨벽진이씨의현 조의 위패를 봉안) ③송현사(김굉필 정여창의 위패 봉안) ④협문 ⑤관리사 ⑥사주문(정문) 용담공박이장신도비와어필비각-경북 고령군운수면유동마을 ▲지동암(志同巖) ▲불이문(不二門) ▲장구지소 ▲판윤공유허비 ▲죽백사윤동마을 ▲영모재(판윤공의濟舍 ▶주부공파(主簿公派) 모효재-모헌공박신손의재사이다.수륜면오천리소재 ▶진사공파(進士公派) 진사공박두성의제단비-고령군쌍림 면반룡리 뱚판윤공(判尹公)의유적(遺跡)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