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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8월31일 목요일 2 (제128호) 기 획 포석정은 『삼국사기』에서 927년에 해당하는 경애왕 4년조 및열전견훤조에걸쳐2회만나오고있다.『삼국유사』에는달 리 헌강왕,견훤,김부,빈녀양모조 등 4회에 걸쳐 나타나고 있 다.이를정리하면다음의표1과같다. <표1> 위의<표 1>을보면몇 가지가주목된다.『삼국사기』에 의하 면, 포석정은 2회만 나타나고, 모두 경애왕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한데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더하여, 포석정에 대 한 새 로 운 단 서 를 두 차 례 , 곧 나 -2 )③ , 나 -2 )④ 에 걸 쳐 제 시하고있어,묘한울림을준다. 까닭에 나-2)③, 나-2)④는 포석정에 관한 한, 일연만의 독 특한 역사 해석이 담겨 있다고 믿어진다. 일연은 왜『삼국사 기』와는 다른 포석정 관련 기록을『삼국유사』속에 추가하여 남겼을까. 또한 이를 통해 일연은 대체 포석정에 대해 무엇을 알리고 싶어 한 것일까. 이러한 의구심은 경애왕의 죽음과 연 관된 포석정의 실체를 풀어나감에 있어 주된 열쇠가 아닌가 여겨진다.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에서 서술하지 않은 부분이 추 가되어 있다.그리고 그 중의 하나가 나-2)③의 기록이다.『삼 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 망해사(나-2)③)관련 기록을 살펴 보면두단락으로대별된다. A)①又幸鮑石亭.②南山神③現舞於御前.左右不見.王獨見 之.④有人現舞於前. ⑤王自作舞. ⑥以像示之. ⑦神之名或曰祥 審. B)⑧故至今國人傳此舞. ⑨曰御舞祥審. ⑩或曰御舞山神. ⑪ 或云. 旣神出舞 審象其貌.命工摹刻. 以示後代. ⑫故云象審.⑬ 或云霜髥舞. ⑭此乃以其形稱之『삼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 망 해사 . 나-2)③은 A와 B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헌강왕과 관 련한 전승을 채록한 A 단락,포석정에 관한 일연의 견문을 담 은 B단락이 바로 그러하다. 위의 『삼국유사』나-2)③을 보면 헌강왕은포석정에행차한것으로나타난다. 앞서 헌강왕은 開雲浦에 유행했고, 이어 포석정, 金剛嶺에 유행했다. 까닭에 헌강왕의 포석정 유행은 헌강왕이 유행한 동선의한축에해당한다. 또한 포석정 행차의 시점은 開雲浦 행차 이후의 일이었다. 開雲浦 행차는 대략 헌강왕 원년~헌강왕 5년 3월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포석정 행차는 헌강왕 원년~5년 3월 이후 시기라 봄 이옳을듯하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하자(A)①) 남산신이 어전에 현현 했다(A)②). 이로 보면, 헌강왕 당시 A)①의 포석정은 이미 건축되어존재했음을알수있다. 또 헌강왕, 남산신이 포석정을 중심으로 상호 연결됨을 알 수 있다.왕궁,혹은 제3의 장소가 아닌,헌강왕이 굳이 포석정 에 행차했을 때에만 남산신이 현현했다. 포석정은 가히 헌강 왕의 접신 장소, 곧 ‘至聖所’라 할 만하다.곧 포석정과 남산신 의 관계가 연이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양자가 불가분의 관계를형성하고있다. 헌강왕만이 현현한 산신을 보았고( A)-②,③), 인간의 몸 으로 현신한 존재가 다시 어전에서 춤을 췄다(A)-④). 헌강 왕 스스로도 따라 춤을 춰 동반한 군신에게 그 동작을 보였다. 이런 점에서, 헌강왕은 마치 영험한 영매의 느낌마저 불러일 으킨다.기록의 끝에는 남산신의 이름을 ‘祥審’이라 한다는 설 명이부기되어있다. ‘祥審’의 語義가 ‘상서로움을 살피다’의 뜻이었다. 까닭에 헌강왕은 당시 현신한 산신과의 대면을 강조하려 했고, 실제 강조했다고도보인다. 『삼국유사』나-2)③의 B단락에서 포석정과 연결된 神의 진 면목은 일연의 손을 거쳐 더욱 상세한 설명이 곁들어져 있다. B⑧에 의하면 일연 당시까지 남산신의 춤은 ‘國人’에게 여실 히 전해지고 있었다. 포석정에서 현신한 神의 출현담을 두고 다양한 담론이 제기되고 있을 만큼, 세간에서 중요한 의미를 점하고있었다. 그 결과 신의 춤을 두고 그 이름이 ‘祥審’. ‘山神’. ‘審象’ 등 다양하게 불리었다.그 형상은 ‘서리처럼 하얀 수염을 기른 형 상’(⑬或云霜髥舞)이라 한, 생생한 전언을 찾아볼 수 있다. B 의 짧 은 단 락 내 에 서 일 연 은 애 써 ‘⑨ 曰 ’, ‘ ⑩或 曰 ’ ‘ ⑪或 云 ’. ‘⑫故云’‘⑬或云’등다섯갈래說을집약,고증하고있다. 헌강왕의 접신을 다룬 A단락이 42글자, 일연의 견문에 의 한 B단락이 53글자인 것은 포석정, 또는 이와 연결된 산신 자 체에 대한 일연의 뜻,의욕이 작용하고,다분히 개입한 결과라 판단된다. 결국 일연은, 포석정이 헌강왕 당시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 며, 그곳에서 헌강왕은 남산의 산신을 홀로 보았으며, 그것은 헌강왕의 망상, 환영이 아니라 춤으로 재현할 만큼 생생하고 도핍진한접신,영매의과정이었음을드러내고있다. 일연당시까지다양하고폭넓은해석과민담이이어지고있 었으며, 풍부한 고증이 일연 자신에 의해 다각도로 이뤄졌다. 이것은 헌강왕 당시는 물론이고, 일연 당시까지 포석정은 그 만큼중요한의미를지닌지성소였음을드러낸다. 특히 헌강왕의 명령에 의하여 화상석이 제작된 사실(나-2) ③ B)⑫), 그리고 그 사실이 일연에 의해 어김없이 채록되었 음은매우주목된다. 그 화상석이 포석정의 입구 혹은 접신의 특정 지점,혹은 헌 강왕의 作舞 지점에 설치되었을 거란 점에서 포석정의 신성 성, 지성소의 표지 역할을 충실히 다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경애왕은헌강왕의선례를따라백고좌회를강경케했음이 주목된 다. 경문왕의 후계자인 헌강왕은 즉위한 이듬해 초에 황룡사에 백고좌를 설치하고친히거동하여講經을들었으며, 정강왕역시그렇게했다. 진성 여왕도즉위직후이 의식을행한 바있다. 따라서924년2월19일위응이 황룡사에百座를설치하고說經을하며겸하여禪僧300명에게음식을먹 이고 친히 行香을 하고 불공을 드려 ‘百座通說禪敎’의 단초를 열었던 사 실은종래김씨왕실의전통을확대ㆍ계승한 것으로 정치세력의포괄적융 합을 다분히 염두에 둔 조치였다. 그러했던 경애왕이 자신의 외조이자, 김씨 왕실의 상징적 존재인 헌강왕이 지정한 지성소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있었다는것은이율배반이다. 일연당시까지도포석정은멀쩡히지성소로여겨지고,전승 되던 곳이었다. 일연 당시까지도 지성소의 맥락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일연이 븮포석정=지성소븯임을 드러내는 전거 를 채록했던 것이었고,이는 일연의 노력에 앞서 유구한 전승, 전통의힘이었다.그렇다면일연보다앞서김부식이활동했던 인종의 치세에, 븮포석정=지성소븯라는 전승, 전통이 있었음은 의심의여지가없다. 한데 『삼국사기』를 통해서는 포석정이 성스러운 장소라는 의미를전혀찾을수없다.『삼국사기』에의할경우,주연의장 소,망국의장소로만포석정이다가온다. 포석정과 관련하여,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에서 서술하 지 않은 부분, 이를테면 일연이 나-2)③을 새삼 추가한 까닭 에대해선물론이고,거꾸로『삼국사기』가『삼국유사』의집필 시점에서도 채록될 수 있었던 중차대한 포석정 관련 내용(나 -2)③)을 모조리 삭제한 까닭과 배경에 관해서 아예 의문을 표한전작이없었다. 포석정을 놓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해석은 극단의 대조를 보인다. ‘포석정=지성소’라는 전승은 김부식의 생존 당시는 물론이고, 적어도 일연이 생존한 때까지도 전승되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1)븮포석정=지성소븯(헌강왕)라는 전승 을 아예 무시하였고, 대신 포석정=술판의 장소(경애왕)라는 극단적사실만을강조한셈이된다. 븮포석정=지성소븯(헌강왕), 포석정=술판의 장소(경애왕)라 는 대립하는 두 가지 사실을 함께 받아들이기란 어렵다. 지성 소인 포석정에서 주흥이 과연 가능했었는지, 논리상의 면밀 한 검토나 의심은 응당 당연하고, 따라서 지성소에서 주흥이 있었던까닭에대한구체적서술이있었어야만한다. 『삼국사기』는 왜 븮포석정=지성소븯(헌강왕)라는 사실에 관 해 철저히 침묵을 지켰던 것일까.2)『삼국사기』의 필법대로라 면 경애왕은 망국의 혼군이었다.경애왕=혼군,암군임을 드러 내기 위해서도 븮포석정=지성소븯임을 우선 밝히고, 그러한 지 성소인 포석정에서 경애왕이 주흥에 빠져 비운의 죽음을 당 하였다고서술함이마땅할것이라는점이다.한데 『삼국사기』 는1),2)의원칙을비껴가고있다. 『삼국사기』는 븮포석정=지성소븯(헌강왕), 포석정=술판의 장 소(경애왕)를 같이 기록할 경우, ‘지성소에서 과연 술판이 가 능했던 것일까’라는 원초적 의문에 봉착할 것이고, 사전에 이 러한 의문을 잠재우고자 전자를 삭제한 것이 아닌가 보인다. 요컨대,『삼국사기』는 의도적으로 포석정=술판의 장소였음을 드러내려 하였고, 그에 따라 포석정=술판의 장소라는 이미지 자체를 부정하거나, 이미지에 의혹을 불러일으킬 내용, ‘포석 정=지성소(헌강왕)’을 아예 삭제,은닉한 것은 아닌지 여겨진 다. 또 하나 포석정은,일연이 서술한 바와 같이,헌강왕이 각별 한 의미를 부여한 지성소였다. 포석정에 지성소의 의미를 부 여한장본인헌강왕은경애왕의外祖였다. 일연당시까지도지성소의맥락은이어지고있었다. 그렇다면 일연보다 앞서는 김부식의 활동 시기, 또 그보다 더욱 앞서는 신라 경애왕대에 있어, 단연 포석정은 지성소로 서의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된다. 외조인 헌강왕이 지성소로 규정한 포석정에서, 『삼국사기』에 의한다면 외손자인 경애왕 이술판을벌인셈이된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이른 것은 875~885년이며, 헌강왕이 사 망한것은885년이었다. 경애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것은 927년이었다. 경애왕이 불 과 반세기(대략 42~52년)만에 포석정을 지성소에서 거나한 술판의장으로바꾸어놓은것이된다. 경애왕이포석정에서술판을벌인시점은견훤의침습을눈 앞에둔상황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당시 위기 상황에서, 외조 헌강왕이 신 성한 장소로 지명한 곳에서, 경애왕이 태연히 술판을 벌였다 는『삼국사기』기록의문면은액면그대로믿기어렵다. 유교적 합리성, 논리성으로 무장한 『삼국사기』의 서술에서 이러한 인과 관계의 모순을 파악하려는 문제적 관점과 시각 이애초없었다는것은의아하다. 『삼국사기』의 찬자들이 처음부터 경애왕=망국의 혼군, 포 석정=술판의 장소라는 등식을 설정하였고, 그에 맞추어 사실 을 기록하고 채록하다보니, 이와 같은 결과가 나타난 것이었 다는판단이일단가능하다. 이에 경애왕의 죽음과 관련한『삼국사기』의 서술 경애왕의죽 음에 관한 한,『삼국사기』에서 경애왕의 죽음을 논한 것으로는 1)경애 왕조, 2)경순왕논왈조, 3)열전견훤조등세곳이 있다.(『삼국사기』 권1 2 신라본기12 경애왕 4년 11월조,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 조 사론,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조,), 포 석 정 의 서 술 전 반 에 대해근본적이고도원초적인의구심을품지않을수없다. 포석정과 관련한 일연의 서술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 은 『삼국유사』권5효선9 貧女養母 (나-2)④)이다. 나-2)④는 포석정이 김씨 헌강왕뿐만 아니라 김씨 효종랑 과도밀접한관련이있다는새로운사실을피력하고있다. 다시 말해 포석정은 두 명의 김씨(헌강왕과 효종랑), 심지 어는 세 명의 김씨(헌강왕,효종랑,김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 고 있 다 . 일련의내용에의하면효종랑은포석정에서휘하무리의회 합을 가졌고, 그런 와중에 가난한 소녀를 구빈하였다. 『삼국 사기』에 의하면 효종랑은 이를 빌미,혹은 명분으로 헌강왕의 딸과 혼인하고 있다. 까닭에 포석정은 효종의 자취와 동선을 보여주는 일단이며, 효종의 결혼을 가늠하는 증거이며, 그 결 혼을 통하여 효종의 아들, 김부가 태어났으니 김부의 출생을 이끈 곳이며,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운명이 갈리고 그 뒤를 이 어 김부가 견훤에 의해 권지국사로 옹립되었으니 김부의 집 권을이끈,‘흥왕지지’라고일컬을수있다. 결국 나-2)④는『삼국사기』에서는 볼 수 없는, 포석정에 대 한 새로운 사실들을 듬뿍 담고 있는 셈이다. 나-2)④ 기록은 아래와같이내용상다섯단락으로세분될수있다. A)①孝宗郎②遊③南山④鮑石亭.[⑤或云三花述.] ⑥門客 星馳.⑦有二客獨後.⑧郎問其故. B)⑨曰芬皇寺之東里有女. ⑩年二十左右. ⑪抱盲母 ⑫相號 而哭. ⑬問同里. ⑭曰. ⑮此女家貧. 乞 而反哺有年矣. 適歲荒. 倚門難 以藉手. 贖賃他家. 得穀三十石. 寄置大家服役. 日暮 米 而來家. 炊餉伴宿. 晨則歸役大家. 如是者數日矣. 母曰. 昔日之 糠粃, 心和且平. 近日之香, 膈肝若剌, 而心未安. 何哉. 女言其 實. 母痛哭. 女嘆 己之但能口腹之養. 而失於色難也. 故相持而 泣.見此而遲留爾. C)郎聞之潛然. 送穀一百斛. ?郎之二親亦送衣袴一襲. 郎之 千徒,租一千石遺之.事達震聰. D)時眞聖王賜穀五百石,幷宅一廛.卒徒衛其家.以儆劫掠.? 旌其坊爲孝養之里. E)後捨其家爲寺,名兩尊寺『삼국유사』권5효선9 貧女養母. 위 기록 중,A단락은 효종의 포석정(혹은 삼화술)유행과 1 천 문객의 회합 및 두 문객의 지각,B단락은 두 문객의 견문을 통한 ‘맹모’와 ‘빈녀’의 처연한 삶과 몰락, C단락은 효종과 효 종 양친의 사후 조치 및 효종 휘하 1천 낭도의 갹출과 적선, D 단락은 당시 진성여왕의 포상과 연좌를 적용한 방리 표창, E 단락은 『삼국유사』의 기본 서술 의도와 부응되게 盲母 사후 ‘빈녀’의경건한신앙적삶을담고있다. 위 기록에서 구분된 다섯 단락의 주어는 A-孝宗郎(①),B- 二客(⑨,주어생략), C-孝宗郎, 孝宗의 二親, 孝宗의 낭도 1천, D-眞聖女王, E-‘빈녀(주어생략)’로 정리된다. 결국 나-2)④ 기록, 『삼국유사』의 貧女養母조에서 ‘빈녀’는 제목과는 달리, 수동적,수혜적인객체에불과하다. 그나마 ‘빈녀’의 역할을 드러낼 E단락에서조차 ‘빈녀’는 주 어로표시되어있지않다. 가장 주요한 인물인 ‘빈녀’의 성명, 가계 등은 모두 생략된 채,본문 첫 단락의 주어로는 효종이 등장하며,효종을 중심으 로스토리가진행되고있다. 결국 B, E단락에서 ‘생략된 주어’는 일연의 어떠한 사전 의 도, 곧 일연이 초점을 두지 않으려 한 자취라 여겨진다. 그러 므로 나-2)④는 제목(‘貧女養母’)과는 달리, 주로 孝宗郎과 그 주변 인물, 진성여왕이 제각기 서술의 중심축이자 능동적 역할을담당하고있다. 위의 나-2)④ 『삼국유사』와 相似한 기록이『삼국사기』에도 나타난다.『삼국사기』기록을내용에따라 단락 구분하면 다음 (다-1)과 같다. 다-1) A)①孝女知恩, ②韓?部 ③百姓連權女子也. ④性至 孝, 少喪父, 獨養其母. ⑤年三十二, 猶不從人, 定省不離左右, ⑥而無以爲養,⑦或傭作⑧或行乞,得食以飼之.日久不勝困憊, ⑨就富家請賣身爲婢, ⑩得米十餘石. ⑪窮日行役於其家, 暮則 作食歸養之. 如是三四日, 其母謂女子曰: ⑫“向, 食 而甘, 今則 食雖好, 味不如昔, 而肝心若以刀刃刺之者, 是何意耶” ⑬女子 以實告之. ⑭母曰: “以我故使爾爲婢, 不如死之速也.” ⑮乃放 聲大哭,女子亦哭,哀感行路. B)뛝時孝宗郞 뛞出遊, 뛟見之, 뛠歸請父母, 뛡輸家粟百石 及衣物予之,又償買主以從良.郞徒幾千人,各出粟一石爲贈. C)大王聞之, 亦賜租五百石, 家一區, 復除征役. 以粟多恐有 剽竊者, 命所司差兵番守. 標榜其里曰孝養坊, 仍奉表, 歸美於 唐室. D)孝宗, 時第三宰相舒發翰仁慶子, 少名化達, 王謂 雖當幼 齒, 便見老成, 卽以其兄憲康王之女, 妻之『삼국사기』 권48 열전 8 효녀지은. 위 기 록 중 , A 단 락 은 효 녀 ‘知 恩 ’의 출 신 , 가 계 , 연 령 , 糊 口 , 賣身의 과정,B단락은 효종의 韓?部 유행과 통곡하고 있는 모 녀에의 親見, 효종 양친과 휘하 낭도의 갹출과 적선, C단락은 당시 大王의 포상, 포창, 사후 조치, D단락은 효종의 가계, 兒 名 , 헌 강 왕 왕 녀 와 의 혼 인 등 이 서 술 되 어 있 다 . 각 단락의 주어는 A-효녀 ‘知恩’,B-효종,C-대왕,D-효종, 대왕으로 확인된다. 결국 지은과 효종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양자가서술의주체임이짐작된다. 위의두 기록(나-2)④,다-1)이 각각전하고있는 사건은 과 연 동일한 사건일까. 두 기록의 공통점은 ①맹모와 외딸(나- 2)④), 모녀 세대(A)④)로 구성된 결손, 극빈가정이라는 점, ②사건 전개 과정에서의 효종,효종의 양친,효종 휘하 무리의 갹출과 적선, ③ 眞聖王(나-2)④ D), 대왕(다-1)C)의 포상, 포창, ④ 倚門, 藉手,贖賃(나-2)④)과 傭作, 行乞,賣身(다-1) ⑦~⑨) 등 오랜 세월 겹쳐 나타나는 가혹하고 辛酸한 삶의 단 면 등 이 다 . 이처럼 효종이 두 기록에서 아울러 중심인물로 등장하고, 효종 양친, 효종 휘하 낭도, 당시 왕의 구휼이 전개된 양식으 로 보아 두 기록은 별개의 사건이 아닌,동시대의 동일 사건을 전한것으로판단해도무방할것이다. 두기록은일견비슷하게비칠수있고,실제거의동일한줄 거리로 구성되어 있다.그 결과 지금까지의 연구는 대개 두 기 록의相似에만초점이두어졌다. 일연은 『삼국사기』기록과 일견 같아 보이는 서술을 행하였 으되, 엄밀히 다른 ‘자기만의 내러티브(narrative)’를 분명히 보이고있다. 일연은 『삼국사기』에 번연히 있는 지은의 이름, 父名, 性情 등허다한내용은죄다‘逸名’,‘누락’으로처리하고있다.반면 효종에 대해선 지나치다 싶을 만큼 깊은 관심을 표현하고 있 다. 일연이『삼국유사』권9孝善編에서 전체5명의인물을거론, 소개하면서 유독 나-2)④만 ‘逸名’으로 처리한 것에는 일연의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 보인다. 까닭에 이에 깊은 주의를 기울 일 필요성이 제기된다 할 것이다. 곧 진정, 대성, 향득, 손순의 이름은 일일이 찾아 기록했으면서『삼국유사』권5 효선9. 오직 『삼국사기』의 ‘지은’에 대해서만 가계를 비롯한 거의 전 정보 를삭제했음이드러난다. 일연의 이러한 서술을 통해 볼 때, 일연은 기실 『삼국사기』 의 ‘知恩’ 이야기에 빗대어, ‘지은’이 아닌 제3의 인물을 강조 하고일연만의해석(version)을부여하려하였다고보인다. 『삼국유사』(나-2)④),『삼국사기』(다-1)이 동일 사건에 관 한 기록이라면, 『삼국사기』에 관해서도 본질적 의문이 제기 된다. 『삼국사기』는 왜 ‘6하 원칙’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시간과 장소에관하여침묵,혹은민멸하고있는것일까. 위의내용에서효종과그의무리의회합지점은포석정이었 고(나-2)④ A④), 효종과 관련한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진성 여왕의치세였다(나-2)④D). 한데 무슨 까닭으로 『삼국사기』는 효종과 낭도의 회합 지 점,나아가시간마저불명으로처리하였던것일까. 시기와 관련하여『삼국사기』는 다-1)C)에서 ‘대왕’, 다-1) B)에서는 ‘時’라 서술하고 있다. 명징한 사실 기록을 강조한 『삼국사기』서술 방식에서, 이런 누락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 는다. 더욱이 ‘여왕’도 아닌, ‘대왕’이라 서술하고 있어, 진성 여왕인지,효공왕인지,신덕왕인지조차 가늠,특정할 수 없다. ‘대왕’으로 모호, 애매하게 처리하는 방식은 『삼국사기』가 아 닌, 외려 ‘전승 중심’의 삼국유사에서 구사하는 서술 방식에 속한다.장소역시마찬가지이다. 다-1) B)의 뛝에서 ‘出遊’라 하였는데, 어디로 출유했으며,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 말하자면 ‘시발’이 불명이 다. 문면대로라면, 효종 한 개인의 유행이었고, 효종 무리의 회합 자체도 없었다.『삼국사기』(다-1)의 서술은 무성한나무 에서뭔가몇몇중요한줄기가잘라진느낌을지울수없다. 하나의 사건을 놓고 『삼국사기』,『삼국유사』가 相似한 서술 을 하고 있으되, 분명히 『삼국유사』의 서사가 보다 원형에 가 깝고, 주요 사실(시간, 장소, 사건 등)을 핍진하게 전하고 있 다고보인다. 그렇다면 후대의 『삼국유사』가 전할 수 있었던 사실들이 어 찌하여시기가앞선『삼국사기』에선서술될수없었는가의의 문이제기될수밖에없다. 그에대한해답은유교적합리성이란사관의문제로만설명 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서 효종과 포석정의 연결 기록이 보이지 않는 점, 효종과 진성여왕의 연결 기록이 없는 점, 효 종한개인의유행으로처리한점등이돋보인다. 결국 『삼국사기』에서 보이는 포석정 관련 서술(다-1)의 제 반 의혹은 1)포석정이 효종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 2)효종이 진성여왕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 3)효종이 포석정에서 무리 를 회합했다는 사실 등을 없애기 위한 노력의 일단이 아닌가 판단된다. 이렇게 보면, 『삼국사기』는 무엇을 누락하였고, 그 까닭은 무엇인지에관한의문이풀리게된다. 곧 포석정은 경애왕의 죽음과 깊은 연관이 있었고, 마찬가 지 경애왕의 죽음과 깊은 연관이 있던 효종,김부 등의 종적을 없애기 위해서 위의 사항들에 대한 민멸이 불가피하였다고 보인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 비정(8) 뱚Ⅰ. 포석정관련기록 박 순 교 뱚Ⅱ.포석정=지성소 뱚Ⅲ.포석정과효종랑 내용 번호 삼국사기 번호 삼국유사 포석정 나-1)① 삼국사기 신라본기 12 경애왕4년11월조 나-2)① 삼국유사 권2 기이 김 부대왕조 나-1)②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휜조 나-2)② 삼국유사 후백제 견휜 조 나-1)③ ?(생략) 나-3)③ 삼국유사 권2 기이2 처 용랑망해사 나-1)④ ? 삼국사기 권48 열전 8 효녀지은 나-2)④ 삼국유사권5효선 貧女養母 뱚1.븮삼국유사븯와헌강왕 뱚1. 븮삼국사기븯와‘헌강왕포석 정유행’의누락 뱚1. 븮삼국유사븯와효종랑 뱚2. 븮삼국사기븯와포석정 뱚3. 븮삼국사기븯와븮효종의포석정유행븯의누락 목 차 Ⅰ . 포 석 정 관 련 기 록 Ⅱ.포석정=지성소 1븮삼국유사븯와헌강왕 2븮삼국사기븯와헌강왕포석정유행븯의누락 Ⅲ.포석정과효종랑 1븮삼국유사븯와헌강왕 2븮삼국사기븯와효종랑 3븮삼국사기븯와븮효종의포석정유행븯의누락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