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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8월31일 목요일 12 (제128호) 기획 일제는무력을앞세워1905년을사늑약(을사조약)을통해외교권을빼앗고,1907년한일신협약을통해군대 를해산하는등우리나라를 식민지로만들기위한작업을차근차근준비해갔다.그리고1910년일본육군대신데라우치가3대통감에취 임하면서한일합병은더욱 빠르게추진되었고,1945년8월15일해방을맞기까지온갖만행과수탈을이어갔다.1919년상해임시정부가 들어서고조직적으로조국 의 독립을 위해헌신하는 많은애국지사들은 활동자금이막혀고군분투하지 않을수 없었다.이에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곳곳에서 암약 하여지원하는데동참했다.이들 가운데는 일경에 쫓기면서 조직의 노출을 막기위해술주정뱅이등의행세를 하다 결국 목숨을초개와 같이버린 독립지사도있다.그리고그 가족들은 술주정뱅이아들로살다 끝내독립운동을 했다는 입증을 못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안타 까울뿐이다. 이번호에서는북로군정서소속흥업단원으로독립자금을마련하여지원하다왜경의추적을피하기위해주정 뱅이,노름꾼,방랑자로가 산을탕진한폐인으로신분을위장하다결국조직의노출을막기위해스스로목숨을바친박재화의사와선고 (先考)의독립사실을밝혀 낸가족들의이야기를실어본다. 박 의사는 퇴계학맥을 이은 거유(巨儒) 통덕랑 휘 세환 공과 부림홍씨 사이에서 1885년 11월 18일 경북군위군부계면화리에서태어났다. 본관은 함양으로 중시조 상서공(휘 善)의 29세 손이다. 상서공의 현손 신유(臣 찮)는 은청광록대 부(銀靑光祿大夫), 판리부상서(判吏部尙書)를 지 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상주국 판삼사 사(上柱國 判三司事)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지고 시호(諡號)는충질(忠質)이다. 충질공이 여섯 아들을 둠으로서 오늘날 함양박 씨 6지파(之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박 의사 는 삼남 휘 지량(之亮) 판삼사사(判三司事)공의 후예로 조선개국 초 왜구정벌의 공훈을 세워 명곡 서원 경덕사에 배향된 박성양, 조선 중종조 선구 적 농학자 학천공 박승은 모두 의사의 상조(上 祖)이다. 선고(先考) 통덕랑공 휘 세환(호 이산)은 이 만 포, 곽 만우, 장 매당 문하에서 수학하고 김창수와 동문수학 한 퇴계학맥이었다. 문집 10여권의 저서 를 남기고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여 유덕(遺德)을 추모하기 위해 조직된 보인계(輔仁契)가 지금까지 이어오며향당의추앙을받은큰어른이다. 박 의사는 일찍부터 아버지 이산공의 학문을 이어받아 학문대성의 길을 향하였으나,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군대가 들어오면서 계파가 나누어 지고 결국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박 의사는 항일 투 쟁 의 일 선 에 설 뜻 을 결 연 히 굳 히 고 나 라 의 광 복을 선택하였다. 북로군정서 흥업단 단원으로 독립군의 자금지원을 위해 노력하다 동지들이 하 나 둘 일경에 체포되고 급기야 일경의 추적은 긴 박하였다.이 사건의 관건을 쥔 박 의사가 만일 일 경 에 붙 잡 혀 그 조 직 이 드 러 나 게 되 면 문 제 는 더 악화되기에 죽음으로서 이를 지키기를 결심하였 다. 의성군 금성면 학미리에 있는 선영은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이고, 학이 울었다는 구고재(九皐 齋 ) 는 하 늘 에 도 호 소 할 수 있 는 곳 이 라 , 말 없 이 죽엄의 길에 나가니 1928년 8월 2일이었다. 박 의 사 의 생 애 4 0 년 은 비 록 짧 은 기 간 이 라 할 수 있 으 나 그 업 적 과 정 신 은 우 리 독 립 운 동 사 의 큰 별 로서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길이빛날것이다. 북로군정서흥업단원박재화의사 박 의사는 당대의 거유(巨儒)였던 아버지 통덕 랑공으로 부터 일찍이 글을 배워 시문에 뛰어난 자 질을보였다.그러나박의사의유년기는조선의입 지가풍전등화의암울한시대였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사조약)을 통해 외교 권을 빼앗고, 1907년 한일 신협약을 통해 군대를 해산하는 등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작 업을차근차근준비해갔다.1910년 일본 육군 대신 데라우치가 3대 통감에 취임하면서 한일합병은 더 욱 빠르게 추진되었고, 일본의 헌병이 경찰 업무를 대신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협했으며, 일본 의 정책에 반대하지 못하게끔 신문·잡지를 엄중하 게 검열하는 등 한국은 사실상 일본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된것이다. 1919년 1월 고종황제는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다. 고종은 망국의 한에 젖어 있던 조선인들에게는 상 징적인 인물이었다. 고종의 죽음은 한일병탄 뒤 나 라가 없어진 조선인들에 북받치는 설움을 안겼으 며 사람들을 격분시켰다. 고종의 죽음이 일제의 암 살 때문이라는 소문이 급속히 퍼지면서 일본에 대 한증오심은점점커져갔다.국내정세가격하게흘 러가고, 고종황제의 인산(국장)일인 3월 1일을 기 점으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가는 정국을 지 켜보아야했다. 그리고 1919년 9월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독립단체들의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고, 이 해 북 로군정서가 조직됨으로서 의사는 흥업단에 가입 하게 된다. 본부에서 내려온 동지 이만준, 김인제 등과 함께 1921년 대구,밀양,양산에 본거지를 두 고 영남일대를 무대로 독립운동 자금조달을 주 목 적으로 활동하여 많은 성과를 보였으며, 손기성, 권충락, 이재술, 김영환, 최명해, 삼상욱, 박사림, 정약산, 손원헌, 우홍기, 박수의, 권정락, 홍종락, 이재술, 양한위, 권충갈, 김종만, 권정락 등과 맹 활약을 하였는데, 특별히 동지 홍종락, 이재술, 권 충락, 양한위, 김종만, 권정락 등과 함께 달성, 영 천, 청도 등에서 크게 활동하였으나, 1922년 1월 에 동지 홍종락이 대구에서 붙잡혔고, 같은 해 5 월에는 이재술,김우창이 군위에서 차례로 체포되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삼엄한 경찰 망을 따 돌리고 남은 동지들과 함께 독립자금을 모아 본부 로의송금활동을계속하였다. 군자금을모금하는당시의상황은녹녹치않았다. 이에대대로 내려온농토등 가산을정리할 수밖에 없어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가고, 왜경의 수사망을 피하기위해주정뱅이노름꾼등폐륜아로위장했으 나 급 기 야 체 포 위 기 에 처 해 조 직 을 살 리 기 위 해 1 92 8년 8월 2일 자결을 선택 자신의 죽음으로서 동지와 조국을살리는살신성인의정신을보여주었다. 묻혀진행적후손들의노력으로드러나 박재화 의사는 아들 삼형제(형석, 두석, 건석) 를 두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에게 비쳐진 아버 지는 퇴계학맥을 이은 유학자 집안에 장래가 촉망 된 청년지도자가 아닌 주정뱅이, 노름꾼, 방랑자, 가산을 탕진한 폐인으로 밖에 기억될 뿐 독립운동 을 하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모른다. 박 의사의 아 들 효당공(휘 두석)의 나이 12세에 박 의사는 자 결로서 생을 마감하였으나 정작 그의 아들은 아버 지의 얼굴을 두 번 밖에 보지 못한 상황에 얼굴조 차 희미하지만 폐인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만큼 스스로 철저하게 자기를 숨기고 위장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깊은 원망을 갖고 살아가던 어느 날 부산고등검찰청에서 한통의 서류가 도착했다. 피스톨권총을들고강도로협박공갈을한가담자7 인 사건에 아버지 이름 석자가 있는 것이다. 이제 가산을 탕진한 폐인도 모자라 권총강도라니 원망 과함께미움으로바뀔때아들두석은뜻밖의계기 로인해아버지를새롭게알게되었다. 외가가 있는 군위군 부계면의 독립운동가 홍종 락 의사의 후손이 국가 표창을 받고 비석을 세운다 기에 가보았는데 홍 의사의 사적비와 유적비에 아 버지박재화이름이새겨져있는것을보았다.홍종 락 의사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한 기록이 새겨진 것이다. 순간 너무나 감격해서 오리려 당연하여 보던 눈 을 의심하였다. 이제 이 세상에서 부군(아버지)의 풍의(風儀, 풍체)를 세삼 우러러 뵈옵는듯하여 그 동안잘못인식한것에대한가슴속깊은회한을토 해내듯엎드려끝없이울었다. 홍 의사의 유족으로부터 당시의 관계문헌을 입 수하여 재삼 열독(閱讀)하니 1934년(일제 소화9 년) 3월 25일 발행된 경북경찰부 사건취조검사국 송치서와 조선총독부 부산지방검찰청발행 재판확 인정서 기록에 을미3.1독립만세운동 발발(勃發)을 계기로 만주 무송현에서 조직된 길림성 군정서(북 로군정서)에 부속된 흥업단에서 운영하는 백산무 관학교의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김인제,최성기,황 문익, 이만준 등을 국내에 잠입시켜 대구, 밀양, 양 산등지에거점을두고부군(府君)및이만준,이재 술, 박수의, 권충락, 홍종락, 김종만, 양한위, 우홍 기, 권정락, 손기성, 김연환, 최명해, 심상욱, 박사 수, 장요순, 손기헌 등으로 하여금 모금운동을 개 시하여 조달된 자금은 무관학교로 송금하고 계속 활약 중 1922년 1월에 대구에서 홍종락을, 5월 27 일에 이재술, 김창우를 군위에서 체포하고, 이들 애국지사를 강도 및 상해 재령위반의 죄명을 씌워 구속하고, 관련 자료를 정리해놓은 조선총독부 재 판문서를확인하였다. 이제야 아버지의 행적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보게 된 아들 효당 두석 공(公)은 아버지의 독립운 동사실을국가보훈처에알려1999년8월15일국가 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묻혀 질뻔 한 독립운동 사실이 아들의 노력 끝에 세상에 빛이 나게된것이다. 아들 효석 은 선고(先考)의 묘비를 세우고, 기적 비를 선조의 숨결이 흐르는 재사 만화당 경내에 세 우는 현창사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사 를 다음과 같이 정리 기록하고 있어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인식의회한을담고있어옮겨본다. -생략- 府君(부군)은 西紀(서기)一八八九年(高 宗己丑) 十一月 十八日에 軍威郡(군위군) 缶溪面 (부계면) 華里(화리) 寓第(우제)에서 출생 하시 다. 天資(천자)가 聰悟(총오)하고 眉目(미목) 淸 瀅(청형)하였다. 七歲에 비로소 大人 梨山公에게 글 을 배 우 기 시 작 하 였 는 데 한 번 배 운 字 句 ( 자 구 ) 는 결코 잊지 않았다. 이로써 課工(과공)이 一進 (일진)하니 大人公이 期望(기망)한 바가 컸다. 不期年에 史略(사략)과 通鑑(통감)을 精讀(정 독)하야 治亂興亡(치난흥망)의 大義(대의)를 通 曉(통효)하고 經傳(경전)을 다배워 詞藻(사조) 가 日就(일취)하니 鄕里(향리)의 칭송이 있었고 年輩(년배)와 同門(동문)이 다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때는 閔妃(민비) 弑害事件(시해사건)과 乙巳年 日帝(일제)의 勒約(늑약)이 이루어져 나 라 안팎에 물끊듯 騷然(소연)하였고 激昴(격묘) 한 民衆(민중)의 怒號(노호)는 燎原(요원)의 불 길처럼 번져갔다. 남달리 感受性(감수성)이 예민 하고 뜨거운 義氣(의기)를 지녔던 府君(부군)은 學 文 ( 학 문 ) 의 眞 理 ( 진 리 ) 에 만 執 念 ( 집 념 ) 할 수 없었다. 미처 庚戌(경술)의 國恥以後(국치이후) 亡 國 ( 망 국 ) 의 피 맺 힌 恨 ( 한 ) 을 품 고 다 만 祖 國 (조국)의 獨立(독립)을 戰取(전취)하기 위하여 抗 日 鬪 爭 ( 항 일 투 쟁 ) 의 一 線 ( 일 선 ) 에 설 뜻 을 決 然(결연)히 굳히고 일어섰다. 爲天下者(위천하 자 ) 는 不 顧 家 ( 불 고 가 ) 라 는 말 과 같 이 飄 然 ( 표 연 ) 히 집 을 떠 나 東 奔 西 走 ( 동 분 서 주 ) 로 전 전 하 기 二 十 星 霜 ( 이 십 성 상 ) 동 안 집 에 들 어 滯 留 ( 체 류)하기란 불과 몇날이 되지 않았다.그동안에 家 産(가산)은 蕩盡(탕진)되어 그 정경이란 愁殺 (수쇄)하기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府君(부군) 의 鐵石(철석)같은 爲國丹喪(위국단상)은 風餐 露宿(풍찬노숙)의 苦鬪(고투)속에 더욱 굳어져 갔다. 그러나 가슴 깊이 간직한 이 秘密(비밀)만 은 비록 부모형제나 內外間(내외간)에도 漏泄 (누설)한 바 없었으니 밖으로 들어난 行蹟(행적) 만으로 봐서는 上奉下率(상봉하솔)한 處地(처 지)로 毁譽(훼예)가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그 러 나 부 군 은 모 든 비 방 과 叱 責 ( 질 책 ) 을 감 수 하 면 서도 목적을 위해서는 沈默(침묵)으로 一貫(일 관)하였다. 흡사 豫讓(예양)(其妻는 不識也어늘 其 友 識 知 ) 의 故 事 ( 고 사 ) 와 방 불 하 여 다 만 血 盟 ( 혈 맹 ) 의 同 志 ( 동 지 ) 만 이 알 뿐 이 었 다 . 날 이 갈 수 록 日帝(일제)의 重壓(중압)과 監視(감시)는 실 오리만한 틈도 容納(용납)될 길이 없고 內外(내 외)로 直面(직면)한 苦悶(고민)이 千 쵱(천인)이 나되는 벼랑 끝에 부딪친듯 하였다. 아무리 헤어 나 려 야 다 시 일 어 설 수 없 는 絶 望 ( 절 망 ) 과 挫 折 感 (좌절감)에서 憂悶(우민)하다가 一九二八년(戊 辰) 八月二日에 그누구도 모르게 金城面 鶴尾洞 (금성면 학미동) 九皐齋(鶴川公會奠所)에서 殉 義(순의)하시니 享年(향년)이 四十歲였다. 그러 나 당시로서는 부군의 生涯(생애)동안 抵死抗賊 (저사항적)의 鬪爭活躍(투쟁활약)을 一船(일 선)은 모르는 사실이여서 다만 夭逝(요서)하였 음을 哀惜(애석)해 하였을 뿐이었다. 葬禮(장례) 또한 墓地法(묘지법)에 拘碍(구애)되어 翌年(익 년) 二月七日 鶴尾洞 先塋階下(선영계하) 酉坐 原 ( 유 좌 원 ) 에 모 셨 는 데 낯 이 선 吊 客 ( 조 객 ) 이 수 백명에 달하였다. 아! 府君의 行蹟(행적)은 이렇게 迷宮(미궁)에 묻혀 白日下에 闡揚(천양)되지 못한 채 56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天地神明(천지신명)과 在天(재천) 하신 祖先(조선)의 蔭佑(음우)라 할까 一九八四年 十二月五日 軍威郡(군위군) 문화원 主管(주관)으 로 建立(건립)된 洪鍾洛義士(홍종락의사)의 獨立 軍動紀蹟碑(독립운동기적비) 除幕式(제막식)에 不肖(불초)가 參末(참말)하였던 바 비문 중에 부 군께서 洪義士와 함께 독립운동에 獻身(헌신)하신 기록을 발견한 瞬間(순간)너무나 感激(감격)해서 오히려 땍然(당연)하여 보던 눈을 疑心(의심)하였 다.이제 이 세상에서부군의 風儀(풍의)를 새삼우 르러 뵈옵는듯하여 肺腑(폐부)를 찌르는 罔涯(망 애)의 슬픔으로 땅바닥에 엎드려 끝없이 울었다. 不肖(불초)의 固陋無聞(고루무문)한 不孝(불효) 의 罪 責 (죄 책 ) 은 이 하 늘 밑 에 디 디 고 설 땅 이 없 다.-생략- 맺음말 전도유망한 사대부가의 청년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식 인 이 라 하 는 사 람 들 이 일 본 의 회 유 에 변 절 한 사 례 를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쉽게 찾아볼 수 있다.1 919년 3월 1일 민족지도자로 나선 33인은 예정된 탑골공원에서의 선언문 낭독을 식당 태화관에서 하였다.표면적인 이유는 많은 군중과 일경의 충돌 로 대규모 폭력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고 우려해 집회 바로전날 모임에서 옥외집회를 포기하고 말 았다. 3월 1일 정오가 되자 탑골공원에는 수천 명 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위해 모여들었으나 정작 기 다리던 주최자들은 나타나지 않고 바로 옆 태화관 의 식당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읽은 후 최린이 직접 총독부 경무총 감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들을 체포해 가라고 자수 의사를 밝혔다. 명백한 투항이었다. 최린 등 이날 식당 태화관에서 연행된 이들의 대다수가 일제의 회유에 포섭되어 친일파로 변절한 것이 대표적 사 례이다. 그럼에도 조직을 살려 원하는 광복을 위해 목숨 을 초개와 같이 버린 박재화 의사의 행위는 시사하 는바크다.또한북로군정서총사령관김좌진장군 의 청산리전투에서의 대승은 군자금을 마련하여 보좌한 박재화 의사와 같은 분이 있었기에 가능하 였다고할수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행적을 찾아 복권시킨 아들 효 당 박두석 공의 효성에 찬사를 보낸다. 옛 말에 훌 륭한 후손이 있음으로서 선조의 업적과 유훈이 빛 이난다하였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유 공자자녀들을우선적으로취직시키도록하였으나 실제 유공자의 후손들은 대개가 학력이 없고 글씨 도 못 쓰는 문맹자가 많아 이마저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가난은 대물림하여 손자에 증손자 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다행이도 정부에서는 유공 자를 발굴하여 혜택을 주고 있으나 다른 사건의 희 생자 유가족과는 형평에 맞지 않아 나라를 위해 목 숨을 바친 애국지사의 처우개선을 간절히 기대해 본다. /글븡사진박상섭편집국장 광복절특집븣 박재화 의사 선조 유지를찾아븣 경북의성군금서면학미3리전경과구고재.학미리는함양박씨500년세거지로구고재는학천공박승(1520~1577)선생이후학을길 러낸유서깊은곳으로,의사박재화공은학미리에있는선영은 조상의무덤이있는곳이고,학이울었다는구고재(九皐齋)는하늘에도호소할수있는곳으로여겨흡업단원들이무사함을기원하고 조국광복을빌며말없이죽엄의길을택한곳이기도하다. 박재화의사의생애 박재화의사의기적비(금성면대리만감정경내)와묘비(학미3리) 흥업단단원들의체포와조사과정에서드러난인물의관리자 료(조선총독부) 홍종락의사의기적비문에박재화공의기록이있다. 정부에서는1999년8월15일고박재화공에게건국훈장애족 장을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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