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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7월31일 월요일 6 (제127호) 기 획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부패(腐敗)와 권력이 난무(亂舞)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청렴결백하고 맡은바 직무수행에 살신보국(殺身報國)혜성 (彗星)처럼빛나는현인으로추앙받고있다. 선생의 휘는 한주(漢柱) 자(字)는 천지(天支) 호는 오졸 재(迂拙齋)이며밀성인(密城人)이다. 1459(세조4)년 밀양부 풍각현 흑석리 차산(현 청도군 풍 각면 차산리)에서 문절공 도은(文節公逃隱)선생의 증손으 로태어났다. 7세 때에 이미 문자를 해독 할 줄 알았으며 16세 때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조선전기의 성리학자·문신. 영남학파의 종조) 선생의 문하에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선생 등과동문수학하였다. 성종 때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제2등으로 급제하 여 직장(直長), 감찰(監察)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 言)으로제수되었다. 성종이 유교존숭(儒敎尊崇)과 문교정치(文敎政治)에 주 력함에 신명을 다하여 충성을 바쳤다.그 때 이세좌(李世佐) 등 임금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을 탄핵했다가 추문(推問)을 받아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옮기게 되자 母夫人을 봉 양해야 한다는 뜻을 담아 외관직을 청하여 창녕현감으로 나 갔다. 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성근(省覲)을 하고 직무로 인하여 문안을 못하면 밤을 이용하여 필마(匹馬)로 근친(近親)하 고등청하였다. 또, 구종(驅從)없이 필마(匹馬)로 여리(閭里)에 암행하 여 민정을 살폈으며 춘추로 양로연을 베풀고 돈본선속(敦本 善俗)하니 효제(孝悌)와 염치(廉恥)의 풍속이 조성되고 사 민(史民)들이 어버이처럼 애모(愛慕)하니 성종이 치적제일 (治積第一)이라고 교서(敎書)를 내려 크게 포상(褒賞)하였 다. 1497(연산3)년에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 겸 춘추관 (春秋館) 기주관(記注官)에 제수되었으며 간관(諫官)이 되 어 왕의 실정(失政)을 극간(極諫)하고, 노사신(盧思愼)·임 사홍(任士洪)을 탄핵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두 간신(奸臣) 의모함(謀陷)을입기도하였다. 선생은 험난한 조정의 간신을 지척(指斥)하고 군심(君 心)을 바로잡기 위하여 직간하였다.친구들은 보신(保身)하 라 하였으나 선생은 뷺신하가 직도(直道)로 섬기다가 갈 뿐 이다. 사생(死生)은 하늘에 메였으니 어찌 자신을 도모(圖 謀)하여 불의에 빠지는 임금을 그냥 볼 수 있겠는가뷻라고 하 였다. 선생은 다시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옮겼으나 연산군이 날로 황란(荒亂)하고 국사가 잘못되자 양친(養親)을 위하 여 외관직을 청하여 평해군로 제수했다가 고향이 멀다하여 예천군수로바꾸게되었다. 선생의 나이 40세 되던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옥사(獄 事)가 일어나자 점필제 선생의 문도(門徒)로서 붕당(朋黨) 을 만들어 국정을 비평(批評)하여 시사(時事)를 비방하였 다는 죄목으로 경사(京師)에 나치(拿致)하여 80도로 결장 하고 벽동(碧潼)에 부처(付處) 했다가 3년 만에 호남의 낙 안군으로 이배되어 그 곳에서 후진을 훈회(訓誨)하여 최두 산(崔斗山)과 같은 많은 명사들을 배출 호남학문의 연원이 선생으로부터나왔다하겠다. 1504년(연산10)5월 15일 갑자사화로 화를 당하니 선생의 나이46세이다. 선생이 영면한지 13년 뒤인 1517년 도승지(都承旨)에 증 직(贈職) 되었으며 133년이 지난1634년(인조 15)에 예림서 원(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배향되고 172년이 지난 뒤에 학사 김응조(鶴沙 金應祖)가 여표비명(閭表碑銘)을 지어 선생의구여(舊閭)인차산(車山)에세웠다. 선생을 제향하는 서원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인 밀양의 예림서원, 청도남산의 남강서원, 함안의 덕암서원, 청도 풍 각의 차산서원, 풍각 흑석의 석강서원이며 문집으로는 오졸 재선생실기가있다. 선생의 휘는 수춘(壽春) 자(字)는 경로(景老) 호(號)는 국담(菊潭)으로밀성인(密城人)이다. 1572년(선조5) 11월 11일 경남 밀양 삽포리에서 문절공 도은(文節公 逃隱 諱 文彬)의 8세손으로 태어났으며, 한강 정구 선생의 문인으로 시(詩) 문학(文學)에도 조예가 깊었 으며성리학에밝았다. 여헌 장현광선생과 교류하여 토론을 깊이 하였으며 시사 (時事)의 이해와 민생의 휴척(休戚)에 대하여 일찍이 마음 에 두지 않은 적이 없었고 사풍(士風)과 향헌(鄕憲)을 부식 (扶植)하는데 더욱 잊지 못하였으니 기덕업풍치(其德業風 致)와 청표고행(淸標高行)이 아속(雅俗)을 진작시키고 인 심을 감복시킬 만 하였으며 충(忠),효(孝),인(仁),예(禮)를 친행(親行)한생애(生涯)라한다. 일찍이 어버이의 명(命)으로 학업에 종사하여 여러차례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나이 약관에 임진왜란을 만나 노 유(老幼)들과청송으로란(亂)을피하였다. 1593년 봄에 병화(兵火)가 생긴 뒤에 기근(飢饉)이 들었 으며 역병(疫病)이 돌아 부모가 사망하고 자매(姉妹) 다섯 사람이 잇따라 사망하였다. 선생도 위태로웠으나 소생(蘇 生)하였다. 여위고 떨리는 몸으로 몸소 일곱 상(喪)을 산속 깊은 곳에 집상(執喪)하고 나물밥과 나물국을 조석으로 올렸고 항상 적은쌀을마련하여삭망(朔望)전(奠)을대비하였다. 이러한 곤궁(困窮)중에도 의지 할 곳 없는 소녀를 거두어 다가매씨(妹氏)와함께거처하게하였다. 1597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와 오직 반장(返葬)하는 장비 (葬費) 마련에 심혈(心血)을 다하였으나 이해 가을에 왜구 (倭寇)가 다시 침입해옴으로 생각하기를 지난 임진왜란에 는 왜적과 싸우지 못한 것은 어버이를 받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을 숨겼으나 지금은 나라를 위하여 죽을수 있다하고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일으켜망우당곽재우와 함께창녕화 왕산성을 고수(固守)하자 원근(遠近)의 의사가 구름같이 모여 군용(軍容)이 정연(整然)하니 왜적의 수장 청정(淸 正)이감히도망하였다. 1598년 전쟁이 약간 안정되자 운구(運柩)를 계획 친지들 의 도움을 마다하고 의례(儀禮)를 갖출 수 없으나 몸소 유체 (遺 體 ) 를 부 운 (負 運 )하 였 으 며 이 밖 에 5 喪 도 차 례 로 풍 각 북쪽 기슬에 반장(返葬)하고 체백(體魄)에 소요되는 제반 준비에정성을다하였다. 영감(永感-부모를 잃어 오랫동안 슬퍼하는 일)후에는 일 체의영달을구하지않고장왕(長往-영원히가다 즉가서 오 래 머무르다)의 뜻을 두어 풍각현 북쪽 산 아래로 이주하였 으니지금의각북면남산리다. 1618년(광해10) 광해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 宮)에 유폐(幽廢)시켰을 때 간신배의 기세가 하늘에 닿았으 며 명유(名儒)들이 쫓겨나고 온 조야(朝野)가 진동(震動) 함으로 이에 대해 말하는 이가 없으나 선생은 홀로 소를 지 어 극언(極言)하고 간신배들의 죄상을 역설,대궐에 나가소 를올렸는데광해가그소를받아들이지말라하였다. 이에 선생은 시를 지어 개탄(慨嘆) 하기를 서궁문폐이윤 두 북궐운심일월혼(西宮門閉彛倫뜯 北闕雲深日月昏-서궁 에 문이 굳게 닫혀 윤리가 무너지고 대궐에 구름 깊어 해와 달이어둡네)이라하자사람들이그충직을감탄하였다. 1636년(인조14)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서울이 함 락하자 의병을 일으켰다가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세자 등 호행(扈行)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삼전도(三田渡) 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 禮)를 한뒤,한강을 건너환도하자 선생은 침식을잊고나는 숭정(崇禎)의 처사(處士)이지 청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 는 결의를 보이는 시를 지었다.(入山甘作崇禎士 處世羞爲丙 子民-산에 들어가 즐거이 숭정처사 되려함은 병자호란에항 복한백성으로세상사는것이부끄러워서이네) 그 후로 세상사와 단절하고 산중에서 학문을 닦고 강론하 며후학을양성하는데에만전념하였다. 1625년(효종3) 11월 8일에 81세를 일기로 고종(考終)하 니 사림(士林)들의 애통함이 친상(親喪)을 당하듯 하였으 며 야노산승(野老山僧) 까지도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다 한 다. 1672년(현종13)에 통정대부 호조참의(通政大夫 戶曹參 議)에 증직되고 밀양 후포에 불천위(不遷位)로 전향(奠享) 하며청도남산의남강서원과대구동구 망우당 공원내 임진 왜란 충의탑(忠義塔) 감실(龕室)에 봉안 전향(奠享) 한다. 저서로는 독서지남(讀書指南), 학문류해(學文類解), 도통 연원록(道統淵源錄), 동방학문연원록(東方學問淵源錄), 의 례견문록(疑禮見聞錄),국담선생문집록(國潭先生文集錄) 등이남아있고국담선생문집판목이보존되고있다. 서원탐방 남강서원(南岡書院) <경북청도군각북면남산2리> 서원전경-①향현사(兩賢祠)②절의문(節義門)③강당회보당(懷輔堂)④성재(誠齋)⑤경재(敬齋)⑥화장실⑦숭경문(崇敬門) 남강서원은창건당시국담박수춘(菊潭朴壽春1572-1 652)선생을 봉안하였고 그 후 23년 뒤에 오졸재 박한 주(迂拙齋 朴漢柱 1459-1504)선생을 추배 배향하고 있 다. 남강서원이 자리 잡고 있는 각북면 남산2리는 1587년 에국담박수춘선생이터를다지고예숭(禮崇)의동풍 을 동민들의생활 속에 심은 후 대대로 후손들이 집성 촌을 이루고 있으며, 1691년(숙종20)에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건립 국담선생을 봉안하였다. 그 후, 23 년뒤에오졸재선생을추가로봉안하고사우(祠宇)를 양현사(兩賢祠)라하였다. 대원군의서원훼철(1868년)의불운을 맞기까지 200여 년간 영호남의 유풍진작(儒風振作)과 인재양성 등 명 실공이충효정신의본산이었다. 남강서원이 훼철된 후 일제 침략의36년과 6·25 동란 등시대적변천은다사다난하였고,130년이지나 는동 안서원복원은누대(累代)의숙원이되었다. 1995년에 이르러 후손 박양흠(朴陽欽) 현종이 1억원 의 거금을 헌성함을 계기로 후손들의 열화와 같은 정 성과 헌성으로 붐을 일으켜 권흠(權欽) 현종 1천 만원 등 수천에서 수백만원 혹은 수십만원씩 각자 형편에 따라 헌성하고 사림들의 헌성이 이어져 서원복원을 결의하고 1995년 8월 29일 서원 기공식에 이어 1998 년11월6일서원을복원하고봉안식을갖게되었다. 서원에는국담선생추선록(목판본21.6×31.8)을포함 한 다양한 고문서와 교지,당시의편액,제기(祭器),당 대의거유(巨儒)김종직,김굉필,조광조,이황,정여창 과 나누었던 유묵이 있으며 국담집, 추선록, 자손록, 밀성박씨 연계도, 선현유묵, 양현록, 오졸재 실기, 남 강서원청액소,등이목판으로보존되고있다. 뱚■서원배향인물의행록 뱚■서원배향인물의행록 뱚오졸재박한주((迂拙齋朴漢柱1459-1504) 박한주선생의여포비(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04호) 경북 청도군풍각면차산리178-1 1629년 중종임금이 선생의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흠모하여이 비를하사하였다. 성재(誠齋) 경재(敬齋) 강당회보당(懷輔堂) 서원출입문숭경문(崇敬門) 양현사제향광경-음3월15일지역유림향사로 봉향(奉享)된다. 모경정(慕景亭)-주민들과 함께하는공간으로 조성하고있다. 뱚국담박수춘(菊潭朴壽春1572-1652)선생 양현사에배향된국담선생위패 서원은 솟을삼문 숭경문(崇敬門)을 지나면 우선 우 측에 정면3칸 측면 2칸의팔작지붕으로 경재(敬齋)와 좌측의성재(誠齋)는 면3칸 측면 2칸의팔작지붕으로 공부하는원생의기숙사이다. 본당회보당(懷輔堂)으로정면5칸측면3칸으로 현 판은 고산 최은철이 쓴 현판이 있으며 의전 때 사용하 는큰북(鼓)이걸려있다. 주로강당으로사용된다. 본당뒤절의문(三門-節義門)을지나면신위를봉안 한양현사(兩賢祠)가있다. 전면3칸측면2칸의맞배지붕이다. 뱚뱚뱛서원의건물배치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