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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7월31일 월요일 5 (제127호) 관향조 종친회 각 관 향 조 종 친 회장을 역임한 원 로모임인 박씨대구 엽합회(회장 태규) 7월 정기월례회가 지 난 1 4 일 대 구 영 남별장에서 있었 다. 이날회의는 해율 (함양) 총무의 사회로 회장인사, 전차회 의록낭독,동정보고,기타토의순으로진 행된 가운데, 태규 회장은 건강한 모습으 로 뵙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고 지난 5월 달 개최된 순천박씨 충정공파 ‘묘골방문 의날’에참석하여많은것을느꼈다며우 리 종친회가 지향하고 있는 것 또한 젊은 청년들의 자발적인 참여인데 순천박씨 문중에서 대안을 제시하였다며 다음기회 에 꼭 참 석 하 여 함 께 배 웠 으 면 한 다 고 말 했다. 이어 동정보고에서 간사 역을 맡고 있 는 상섭 편집국장은 숭덕전릉 참봉 이도 임식과 참봉협의회 선진지견학, 무안박 씨연합청년회화합잔치,순천박씨 묘골방 문의 달, 밀성박씨전국청년회 선조유적 탐방행사를 소개하고, 숭덕전의 기득권 싸움으로 수년간 종원들을 안타깝게 하 고 있 다 고 말 하 고 이 제 기 득 권 을 내 려 놓 고 서로 양보하여 화합을 이루었으면 한 다며 최근의 정황을 설명하고, 묘골방문 의 날은 어린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3대 가 함께하면서 어린이에게는 직접 참여 하는 다양한 게임을 통해 꿈과 추억을 남 겨 다음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기대감을 어른들에게는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보면 서 즐거움을 갖게 되어 종중의 활성화를 이루고있다고소개했다. 기타토의시간에는 오는 10월 23일 함 양지역 함양박씨유적탐방행사를 실시키 로의견을모았다. 함양에는 함양박씨 총본산인 영명재와 중시조 상서공 묘역과 신도비 등이 있으 며, 안의면의 밀성박씨 농월정을 함께 들 러볼예정이다. 박씨대구연합회는 각 관향조 종친회 임원을 역임한 원로분들의 모임으로 지 난 2011년 창립되어 각문중의 전통예절 과 운영방식 등을 토론하며 발전방향을 모색하고 선조님 현창사업을 하고 있으 며, 현재 밀성, 고령, 함양, 월성, 병산, 충 주, 순천, 반남박씨의 전·현직 회장이 참 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참여하지 않은 문중이 있어 이들의 동참을 기다리고 있 다. 박씨대구연합회7월정기월례회가져 종중의전통문화와예절등토론븣10월함양박씨유적탐방키로 박태규회장 밀성박씨 전국청년회(회장 순구)가 지 역 순회회의를 통해 활성화를 이루고 있 다. 지난 5월 27일 부산지역 선조유적탐 방 이후 지난달 17일 경북 포항을 찾아 모 처럼 망중한을 달래며 정을 돈독히하여 8 월청도회의를벌써기다려지게한다. 포항시 북구 대신로 ‘오대양물회’에서 개최된 회장단 회의는 포항에 거주하는 병용 기획담당부회장의 주선으로 개최된 가운데 이날 회의는 선조유적탐방 결산 보고가이루어졌다. 병용 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포항까지 찾아준 회장단에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탁 트인 바닷가에서 회포를 풀고 새로운 기운 충전으로 청년회 발전을 이루었으 면한다며환영사에갈음했다. 이어 순구 회장은 포항지역 회원여러 분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순회 회의 를 통해 더 많은 성손들이 청년회에 가입 하여 함께하였으면 한 다며 8월 청도회의 에더많은회원의참여를당부했다 밀성박씨전국청년회회장단포항에서열려 순회회의를통해활성화모색븣다음회의8월청도군에서개최 청년회회장단이 영일만 바닷가를찾았다. 밀성박씨고양선조원당종중회는 투명 하고 체계있는 운용으로 정평이 난지 오 래다.여타 문중과 달리 송사가 없고 종원 을 위한 복지와 선조님의 숭조사업에 매 진한 결과이기에 더욱 빛이 난다. 지난 7 월 7일 전반기 사업에 대한 결산 감사를 실시하였으며,또한 7월 10일에는 원로고 문회의를 개최하여 전반기 사업결산에 대한 감사결과를 보고 드리고 종중 발전 에대한여러가지의견교환을나누었다. 이날 참석한 원로분들은 종중운영의 산증인으로조언은큰도움이된다. 특히 이날은 초복 을 맞아 보양식으로 전 직원들과 같이 점심식사와 함께 차를 마시며 무더위에 고생한다며 직원들한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화기애 애한 가운데 담소를 나누어 종중발전에 큰 힘 이 되 었 다 ./박봉준명예기자(경기고양시지부) 밀성박씨충헌공파경기도고양시원당종중회 2017년도전반기사업결산감사및원로회의개최 감사광경. 참석한 원로분들이 감사결과를듣고직원들을격 려하고있다. 함양박씨 대종회 박연탁 前 대종회 장이 제29대 담수회장에 이어 30대 회장에 연임되었다. 담수회는 지난 5 월 1 5 일 오 전 1 1 시 담 수 회 관 2 층 대 회 의실에서 대의원 283명중 162명이 참 석한 가운데 2017년도 제2차 대의원 총회에서 제30대 담수회장 선임의 건 이 상정돼 5월31일 임기가 만료되는 박연탁 회장을 만장일치로 연임 추대 했다. 박 회장은 취임승낙 인사에서 “지 난 3년 동안 임원을 비롯한 회원들의 참여와 협조로 대과 없이 회장직을 수행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앞으로 도 담수회의 위상과 발전을 위해 더 욱 성실히 회장직을 수행할 것을 천 명하였다.그리고 관계기관과 긴밀히 협조함은 물론 회원들과의 소통에도 가일층 힘쓰겠으며,공자님의 나눔과 배품의 정신을 실천하고 윤리도덕선 양과 도덕성 회복에 앞장섬과 아울러 ‘온고창신(溫故創新)’으로 유학의 대중화에노력하겠다.”고강조했다. 담수회는 영남학통의 도학정신 (道學精神)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 信 )의 실 천 을 근 본 으 로 하 는 전 통 문 화의 계승, 발전과 겨레의 위난에 순 절(殉節)함을 최고의 의(義)로 삼는 선비정신의 선양을 목적으로 1963년 설립되었으며, 대구 경북 부산 등지 의 회원 5,600여명이 활동하고 있어, 회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전통문화 행사도 마련하고 있다. 아양음사 한 시회를 운영하면서 매년 9월 전국한 시백일장, 10월 회원 서예작품전, 유 적지 탐방 행사도 매년 7,8회,매년 1 0월 열리는 윤리도덕선양대회 개최, 선행·효행상 시상,유공자 표창,장학 금 전 달 등 을 하 고 있 다 . 또 평 생 대 학 원을 운영,한시·건강·법률 등 4개 반 900여 명이 수강하고 있다. 문화교실 에는 한문, 서예, 중국어 간체자반 등 이 있고 한시반도 운영한다. 봉사활 동으로는 추석명절 이웃돕기 바자회, 연말 사랑의 봉사모금 일일찻집을 열 어수익금을기탁하고있다. 박 회장은 1967년 성균관대학교 법 정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69년 연세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서 경 영학석사(MBA) 학위를 취득하고 세무사시험에 합격 후 1970년 대동제 분공업회사와 삼창제지 공업회사를 경영하였으며,현재 대동산업사를 경 영하면서 성실과 근면 검소의 정신으 로 기업을 운영하여 사회로부터 인정 받고 모범이 되고 있으며, 지역사회 발전을위해봉사하고있다. 특히 1970년대 국가경제가 어렵고 국민소득이 낮아 국가적으로 식량이 절대 부족했던 시절 곡물대체 수단인 밀가루 생산을 증대하여 국가의 식량 정책에 기여하고 국민의 식생활개선 에도 크게 공헌했다. 또, 1980년대 삼 창제지공장 경영으로 국가적으로 버 려지는 폐지를 수집하여 재사용하여 원지(종이)를 생산함으로서 국가자 원의 효율적인 관리와 자원의 낭비를 막고 원자재 수입을 위한 외화 지출 을 줄이는데 기여하였고,국제라이온 스클럽 대구경북 라이온스클럽 회장 으로 35년간 봉사활동을 펼치고, 지 역의 장학재단 설립과 장애인 돕기, 국제 어린이 돕기 장기 후원회원으로 사회지도층의 의무를 다하였으며,국 내 최대 유림단체인 담수회에 이어 2 014년 제29대회장으로 취임 국민 윤 리 도덕 선양과 학생들의 인성 교육 에적극앞장서고있다. 특히 종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2 010년 함양박씨 대구경북 종친회 회 장을 맡아 빈약한 재정 확충을 위해 대구 중구 남산동 황실 보성타운 59.9 6㎡(27평형) 아파트 한 채를 구입(1 억원 상당) 종친회에 기증 종친회의 활성화를 이루었고,2013년 대종회장 을 맡아 종원들의 화합과 친목도모에 최선을다했다. 한편 박 회장은 지난 2012년 4월 19 일 춘천향대학교에서 탁월한 기업경 영으로 국가발전과 사회봉사활동에 공헌한 공로로 명예경영학박사 학위 를받은바있다. 제30대담수회장에함양박씨대종회前박연탁회장연 임 도덕성회복에앞장섬과아울러‘온고창신(溫故創新)’으로유학의대중화에노력할터 뷺나는이자리에오기훨씬전부터살아 서 나갈 수 없는 신세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 재 판 은 말 그 대 로 요 식 일 뿐 , 어 떠 한 최 후 진술도 너희들의각본을 뒤집을 수 없 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그렇다면 결론 부터 말하겠다.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주 장하는 미제 간첩과 내가 주장하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 나는 남조선에 있 을 때 , 아 니 그 훨 씬 전 부 터 미 국 사 람 들 과 교분이 있었다. 그 교분은 조국의해방과 독립된 통일 조국 건설을 위한 차원이지 결코 간첩행위가 아니다. 남조선에서 나 는 미군정 고위 장성들을 만나 내가 통일 조국의 최고 책임자가 되면 미국과도 국 가 정 책 을 협 의할 수 있 다 고 분 명 히 밝 혔 다.내가약속한그 협의는현재 소련과 미 국의두 지도자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국 제 문 제 를 협 의하 고 있 는 것 과 같 은 맥 락 이다.1955년 12월 15일 재판,박헌영최후 진술중에서뷻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정 박헌영에 대한 재조명이 각계각층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처형 직전 재판과정 최후진 술또한주목받고있다. 박헌영은 우리나라의 완전 독립을 원 했다. 미국,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은 자 주독립을 위해 27년의 끈질긴 투쟁을 하 여야만 했다. 비록 투쟁의 방식은 달랐지 만독립운동사에길이남을만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회유에 친일파 가 되고, 미국마저 자본주의 시장을 선점 하기 위해 일본과 협력하는 과정을 지켜 본 박헌영은 사회주의 운동만이 조국의 광복을 이룰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세 번 에 걸 쳐 1 0 년 의 옥 고 를 치 르 면 서 도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강력한 조직 재건에나서광복의감격을맛보았다. 그러나 광복이후 사회주의 활동과 월 북,북한의 부수상,그리고 6·25전쟁으로 인해 우리에게는 공산주의자로 낙인 되 어27년의독립운동사는잊어져왔다.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은 같은 공산주 의자로 소련에서 생을 마감했어도 우리 정부에서는 2007년 그에게 독립운동사실 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했 다. 우리 민족의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인 일제강점기를 피 끓는 젊은이로 살아야 했던 독립운동가들 누구보다 앞장섰던 그들의 삶은 역사적 사실로 기록해야 한 다. 어느 쪽이 옳았다는 판단은 그 다음 일이다. 사상과 이념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그의 독립 운동사를 재 조명해보기를 바 라는 바램이다. 다행이도 이정기념사업 회가 발족되어 ‘박헌영 평전’, ‘이정 박헌 영 일대기’,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비운 의 혁명가 만화 박헌영’ 등이 발간되면서 재조명에 이르고 있다. 최근 국가보훈처 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을 추서하고있어다행이다. 한편 이날 이정 박헌영의 61주기 추도 식은 경기도 평택의 만기사에서 이정기 념사업회 회원과 영해박씨 대종회 임원 진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봉행 되었다. 이정 박헌영의 아들이기도 한 만기사 주지 원경스님(대한불교조계종대종사) 은 추모제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매 년 잊지 않고 찾아주시어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언제나 선생님(박헌영)을 기억해 주시기를소망한다고말했다. 박헌영(朴憲永) 선생의 본관은 영해 (寧海), 호(號)는 이정(而丁)으로, 1900 년 5월 1일 충남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 에서 아버지 박현주(朴鉉柱, 1867~1934) 와 어머니 이학규(李學圭,1867~1943)사 이에서태어났다. 1915년 4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 하면서 부모님은 아들이 열심히 공부해 법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박헌영은 조선인 착취에 앞장서는 총독부 관리가 되고싶은마음은추호도없었다. 러시아의 10월 혁명,동양 현대사의 최 대 민중항쟁이었던 3·1 운동은 자신을 공산주의로 진영으로 이끌었다고 고백 한다. 그리고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독 립 운 동 가 로 서 의 삶 은 평 탄 치 못 했 다. 상해 망명과 거듭되는 감옥살이 소련 으로의 탈출 그리고 세 번째 투옥 6년형 선고, 아버지의 사 망 등 가정에도 상당한 고통을감수해야했다. 「일본필패론」을 비밀 출판물로서 선전 공작에 열중하던 박헌영은 1945년 5월 독 일의 항복소식을 접하고 일본의 항복은 더욱 필지(必至)라고 보았고 1945년 8월 9일에 소련군의 대일개전(對日開戰)을 보고서는 일본의 붕괴는 시일문제로 보 았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이란 기쁨 의 날이 오자 그는 취업중인 벽돌공장 감 독에게 “장래를 위하여 서울로 가겠다.” 는간단한말을남기고서울로향했다. 해방 후 약 1년 정도 공산당은 합법이 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울에 중앙당을 두고 지역별로 하부 조직을 두며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모략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은 궁지에 몰리고 1946년 9월 7일 박헌영 등 주요 간부들의 미 군정청의 체포령이 내 려졌으며 동년 대구 10.1 사건으로 공산 당 활 동 이 불 법 화 되 자 박 헌 영 은 월 북 했 다. 월북 후에도 하나의 통일된 나라를 위 해 노력하다 1948년 9월 9일 북한에 정권 이 수립되자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하였 으나, 세력기반이 남한에 있는 그는 소련 을 등에 업은 김일성에게 실권을 빼앗겼 다. 그리고 1953년 김일성에 의하여 남로 당계 숙청이 감행되면서 8월 3일 체포되 어 평안북도 철산군 내의 산골에 감금되 어 고문을 받았다.1955년 12월 15일 미국 의 첩자·정부 전복 음모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1956년 7월 19일 처형되 었다. 한편 1946년 당시 미군정은 사회주의 계열을 탄압하지 않을 경우 박헌영이 한 국의 초대 대통령이 될 우려가 있다는 보 고를하기도했다.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비운의독립운동가이정박헌영선생61주기추모 제향봉행 추모제향에참석한 기념사업회임원진과 문중종원들이 함께하고있다.(사진앞 원경대종사) 영해박씨용국현종(서울 단성유리대표)이 헌작하고있다. 남에서는월북한남로당의괴수,북에서는미제의간첩으로1956년7월19일 김일성에의해처형븣사회주의독립운동가재조명이루어져야 2017년 5월호 9면에 게재된 ‘본보 박현배 명예기자 아 들 진성 군 경영학 박사학위 받아’는 사실과 달라 정정합 니다.진성군은 현재 박사 학위를 받기 전 한가지 과 정이 남아있음을최종확인하였습니다. 지 난 호 2면 ‘박 씨 의 본 관 수 는 몇 개 나 될까 요 ’ 기 사 중 경주박씨가 누락되어 전체본관은 488개에서 489개로 정정합니다. ※ 바 로잡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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