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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7월31일 월요일 4 (제127호) 관향조 종친회 경주박씨는 파사왕(婆娑王)의 26대손이며 신라 만고충신 관 설당휘제상의21代孫문효공휘도덕(文孝公諱度德)을중조로 하고 단종 조(端宗 朝)에 홍문관 저작으로 관직에 있을 때 왕위 를 찬탈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김시습등과 함께 수양산으로 들 어가 절개를 지키고 만년에 함안으로 복거(卜居)한 휘 앙(諱 왑- 시조왕의41世)을1세조로세계(世系)를있고있어찾아가본다. 군북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들어가면 사방이 큰 산맥 으로 둘러쌓인 마을이 하나 있고 이 마을을 평광(平廣)이라하 며 여기서 1㎞ 정도 더 들어가면 명동(明洞)이라는 마을이 있 다.이두개의부락을합쳐서명관리(明館里)라칭한다.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7백년 전 고려 공민왕 때 이루어 졌 다. 원래는 평관(平館)이던 것을 1586년 한강 정구(鄭逑)군수 가 평광리(平廣里)로 개칭했고,뒤에명관리로개명하였다. 명관리 명동마을은 백이산 줄기의 숙제봉 아래 있는 마을로 절의(節義)의상징이기도하다. 백이산(佰夷山)은 명관리(明館里) 평광동(平廣洞)의 뒷산 으로 백이산 동쪽 기슭에 구 서산서원(舊 西山書院)이 있다. 서 산서원은 생육신(生六臣)의 한분이신 어계(魚溪) 조려(趙旅)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이 세운 것으로,백이산 숙제 봉은 유가(儒家)에서 청절지사(淸節之士)로 숭앙 받은 은(殷) 나라 고죽국(孤竹國) 황자였던 백이(百夷)·숙제(叔齊) 형제의 인의(仁義)를 본받은 어계가 은둔(隱遁)하여 여생을 보냈던 산 을 백이산(伯夷山), 그 옆에 있는 봉우리를 숙제봉(叔齊峯)이 라부르게된것이다. 경주박씨의 함안 군 입 향 조 는 시 조 왕의 41세(世)로 홍문관 저작을 지 낸 휘 앙 ( 왑)으로, 저 작 공 은 평 생 에 의분(義憤)에 북받 쳐 개탄하면서 큰 절개를 지켰다. 단 종 을해년(1456년) 에 벼슬길의 영화를 사절하고 동봉 김시습(東峯 金時習), 찬성 (贊 成 ) 유 자 미 (柳 自 湄 ) 선 생 과 함 께 수 양 산 에 숨 어 살 면 서 관 리에등용하려고불러도나아가지않았다. 만년에 함안의 백이산 아래에 살 곳을 정하고 집을 짓고 두문 불출하면서스스로절개를굽히지않았다. 입향 이후 후손들은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交遊)하며 명문가 로 부 상 하 는 동 안 절 의 (節 義 )에 는 저 작 공 (휘 앙 ), 백 성 을 잘 다 스린 실적으로는 청백리(휘 명기)가 있고, 숨은 덕행(德行)으 로는 선무공(휘 정화), 문장으로는 진사공(휘 유), 도학(道學) 으로는 모암(휘 희삼), 송암(휘 제현), 황암(휘 제인), 농은(휘 도원), 산림의 은사(隱士)로는 송계(松溪, 휘 이), 충의(忠義) 에는봉계(奉溪,휘종원),언행을삼가고경계한분으로는삼학 당(三學堂, 휘 근), 쌍학당(雙學堂, 휘 무), 효행에는 주부(主 簿,휘 율),부사(府使,휘 임),수은(睡隱,휘 황),학행(學行)에 는 수심재(收心齋,휘 내정),봉훈재(奉訓齋,휘 함),삼괴당(三 愧堂, 휘 내복), 예학(禮學)에는 명곡(明谷, 휘 동후), 시문(詩 文)에는 매와(梅窩, 휘 사), 부인의 열행(烈行)으로는 김씨, 조 씨, 최씨, 독립지사로는 쌍천(雙川, 휘 상엽) 등 24인의 대표적 인인물을배출토호세족으로성장하였다. 경주박씨의 세계(世系)를 보면 신라 시조대왕(新羅始祖大 王) 휘 혁거세(諱 赫居世)의 4세(四世) 파사왕(婆娑王 -諱 檢) 五世 지마왕(祗摩王, 諱 尼師今) 八世에 신라충신 충열공(新羅 忠臣 忠烈公) 관설당(觀雪堂) 휘 제상 (諱 提上)을 받들고 고려에 이르러 30 世 도덕(度德-文孝公)의 자는 수겸(字 쑴謙)으로 호는 만취헌(晩翠軒)이다.1 008년 목종(穆宗) 11년 甲戌에 출생하 여 1033년(덕종2년) 문과에 급제 한림 학사(翰林學士)와 정당문학 이부상서 문하시중(政堂文學 吏部尙書 門下侍 中)을 지냈고 금자광록(金紫光錄)에 올랐다. 나라에 이바지한 충성과 공훈 도 컸으려니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 하여그가죽으매 왕명으로정려(旌閭) 를 명하였고 시호(諡號)를 문효(文孝) 라시사(諡賜)하였다. 33世휘 황(諱 璜-文烈公)은 자는 한 경(字 漢卿)으로 숙종(肅宗) 壬午年(1 102년)에 출생하여 인종(仁宗) 丙午年 (1126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이부시랑 (史部侍郞) 간의대부(諫議大夫) 중서 시랑(中書侍郞)에임명되었다. 乙卯年(1135년)에 使臣으로 金나라에 가니 금나라 임금이 말 하기를 너의 임금이 주색에 빠져 인도(人道)를 돌보지 않아 짐 (朕)이폐하고자하는데어떻겠는가?하기로공이말하기를“임 금과 신하는 하늘과 땅과 같은 것이니 臣은 비록 죽을지언정 명 령을 듣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금나라 임금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네가속국의 배신(陪臣:천자가 제후의 신하에게 일컫 는 말)으로서 천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요 서하지 못하리라 하고는 곧 형벌을 가했는데 굴복하지 않고 죽 었다. 금나라도 그 충성에 감동하여 호상(護喪)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니왕이분개하고추모하면서말하기를박모는살아서 는 된 서 리 를 맞 아 도 굽 히 지 않 는 절 개 를 가 졌 고 죽 어 서 는 해 를 꿰뚫는 충신이 되었으니 이는 그 선조 충열공(忠烈公 朴提上) 이 남긴 가르침과 절개가 백대(百代)에 흘러 내려 온 것이 아니 겠는가 하고 포상을 내리고 예관(禮官) 김부식에 명하여 제문 을내리기를“마음속에오로지곧은 절개를지녀죽음을당해도 변하지 않고 인륜(人倫)을 밝히고 도리를 다했으니 영원토록 그 의(義)를 기억하리라” 하고 왕례(王禮)로 장사지냈다. 또, 정려(旌閭)를 세우도록 명령하고 개부의(開府儀) 동삼사문하 시중(同三司門下侍中)에 追贈하고 문열(文烈)이라 시호를 내 렸다.묘소는 개성 용수산갑좌이고 묘갈이 있다.아드님으로 소 ( 쏟)와 명천(命天)이다. 장자 소( 쏟)의 시호는 문효(諡 文孝)이며 문하평장사(門下 平章事) 월산군(月山君)에 封해졌으며 아우 명천(命天)은 전 법사판서(典法司判書)예원군(禮原君)에봉해졌다. 39世 원계(元桂)의 字는 순규(舜圭)요 號는 석뢰(石瀨)충선 왕(忠宣王) 癸丑年(1313년)에 출생하여 庚午年(1330년)에 과 거에 급제하여 합문지후(閤門祗侯)를 거쳐 개성부윤(開城府 尹), 이부상서(史部尙書)를 지냈고 癸酉年(1393년)에 별세 하 였다.묘소는 개성 용수산 문충공 묘역내 백호(白虎)辛坐에 있 다.領議政에 追贈 되었으며 諡는 문목(文穆)으로 아들 자인(自 仁-左司議), 자의(自義-文科應校), 자례(自禮-蔭補判官), 자 지(自知-文科典書).자신(自信-國子直學,贈右贊成)으로 다섯 을두었다. 다섯째인 자신(自信)의 字는 현가(賢可)요 공민왕 戊戌年(1 358년)에 출생하여 공양왕 己巳年(13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임명되어 밀직(密直), 응교(應校),국자직학(國 子直學)을 지냈으며 己亥年(1419년)에 별세하였다. 우찬성(右 贊成)에 추증되었다. 아드님은 앙( 왑-경주박씨1세조)과 근무 (根茂-강진을거쳐진도로移居)를두었다. 장자 앙( 왑)은 세종29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1451년 (조선 문종1)에 문과(文科,증광시)에 급제하였으며 홍문관(弘 文館)의 저작(著作)을 지냈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생육신의 한사람)과 더불어 수양산(首陽山) 으로 들어가 도의(道義)를 강론하며 관리에 등용하려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고,만년에 함안(咸安)에 복거(卜居)하여 절의 를지켰으며일찍이절귀한수를지어소외를풀었다. 뷺어느해 동로(東老-김시습)와 함께 수양산에 있었던고/ 곧 은 충성 굳은 절개 가을 서리같이 름름했도다./ 백이산 많은 고 사리 지금 누가 함께 캘까./ 고마정 아래서 나 혼자 슬퍼하노라. 뷻 (원문 東老何年共首陽 危忠苦節凜秋霜 夷薇采采今誰與 叩馬溪亭我獨 傷,동로하년공수양위충고절름추상이미채채금수여고마계정아독상)』 그리하여 후손들은 앙( 왑)을 일세조(一世組)로 하고 선조 (先祖)의 원향지(原鄕地)인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 아세계(世系)를잇게되었다. 입향조 휘 앙의 맏아들 명기(命基)는 문과에 급제하고 신천 군수(信川郡守)로 재임 시(時) 정사(政事)는 청백(淸白)을 숭 상하며세금을낮추고부역을줄였으며춘궁기에는구호미를행 하여 읍양(揖讓)의 풍속을 크게 이룩하는 등 치적(治績)을 세워 그 치적이 조정에 알려져 왕이 불러 왕의 도장이 찍힌 문서로 표 리(表裏-옷의 겉감과 안집) 일습을 하사(下賜) 받았으며, 특히 청백리라고 칭찬하고 다시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임명 청백 (淸白)함으로 이름을 떨쳤고, 그의 아들 정화(精華)는 선무랑 (宣務郞)으로 언행록(言行錄)에 기록되었고,손자 진사공 휘 유 는진사시에합격하여태학(太學)에있으면서경전의뜻을밝히 고 시대의 일들을 본보기로 들 적에 여러 선비들이 앞서지 못했 고,또한감히대항하는사람이없는등문장이뛰어났다. 저작공의 현손(玄孫) 희 삼 (希 參 )과 그 의 아 들 3형제가 뛰어났다. 모암 공(茅庵公. 휘 희삼)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출중 하여 소학동자(小學童 子)라 일컬어졌다. 실지 (實地)의 학문에 뛰어났 으며 성리학의 서적을 깊이 탐구하고 정주(程 朱)의 학문에 침잠(沈潛)하였다.당대의 석학들과 함께 연구하 며사귄친구는당대의명현들로특히남명조식선생과친히아 는 사 이 로 인 해 세 아 들 (齊 賢 , 齊 仁 , 齊 福 )을 그 의 문 하 에 서 배 우게하였다. 맏아들 제현의 字는 맹사(孟思)요 호는 송암(松 옰)으로 中宗 16년(1521년)에 태어나서 명종 때 학문과 덕행으로 공중(公衆) 의 천거를 받아 내금위(內禁衛)선공감(繕工監)을 역임하였다. 특히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일찍이 아버님의 명령에 따라 아우 황암(篁 옰,휘 제인)과 함께 남명 조식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하 여문학과덕행으로세상에널리알려졌다. 일찍이 석학(碩學)정구(鄭逑)가 븮은덕군자(隱德君子)븯라 극 찬했던 둘째 황암공 휘 제인(齊仁)은 남명(南溟)조식(曺植)의 고제(高弟)로 선조(宣祖) 때 태릉 참봉(泰陵參奉)과 왕자사부 (王子師傅)에 천거되었으며 1599년(선조 32) 송라도 찰방(松 蘿道察訪)으로 나갔다가 2년 만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 후 형조 좌랑(刑曹佐郞)과 군위 현감(軍威縣監)을 거쳐 왕자사부 가 되어 세자(世子)에게 대학(大學)을 강론했고, 제용감 판관 (濟用監判官)으로 퇴관하여 학문에만 진력하여 저서(著書)로 황암집을남겼다. 삼남제복의호는미암일(微 散逸)이고호판(戶判)이다. 송암공의 아들 송계공(휘 태)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은 데 힘쓰면서 오직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를 스스로 즐겨 세상의 명예나 이익을 보기를 장차 몸을 더럽히 는 것으로 여겼다. 손자 봉계공(휘 종원)은 도의(道義)로써 사 귀는 사람들이 당대의 유명한 인사가 아님이 없었고,조은 한몽 삼, 인원군 이휴복, 종제 도원(道元, 황암의 손자 호 농은) 등의 여러분들과 금란계(金蘭契)를 만들어 도의를 강론하였다.임진 왜란을만나집안사람들이피난하기를청하니탄식하며사람은 군(君)사(師)부(父)에게서 나고 자랐는데 지금 왜적의 무리들 이 쳐들어와서 왕께서는 밤늦게까지 수라를 잊을 정도로 걱정 이 많은데 신하된 사람이 어디로 가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칼을 집고 몸을떨쳐전장에나가힘껏싸우다가전사하였다.그곧은 충성과 높은 절개는 당시에 의병을 일으킨 분들과 더불어 공훈 이막상막하였다. 증손 근(懃)의 호는 삼학당(三學堂)으로 동생 쌍학당(휘 무) 와 함께 도학과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삼학당의 증 손 수심재공(收心齋, 휘 내정)과 삼괴당공(三愧堂, 휘 내복)은 학문이 뛰어나 고을 선비들의 종사(宗師)가 되었다.(수심재공 과삼괴당공은종방간이다) 현손 문태(文泰,송암공의 현손)는 효성(孝誠)과 학행(學行) 으로 유명했고, 그의 아들 아들 내유(來維)는 한성부윤(漢城府 尹)겸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역임하였다. 송암공의 6대손 황(潢 1709~1775)은 효자로 유명하다. 자는 탁천(卓天)이요 호는 수은(睡隱)으로 통덕랑(通德郞)이다. 숙 종 기축년(1709년) 9월9일에 출생하여 영조 을미년(1755년)에 별세 하였으며 금상 을사년(1785년)에 왕명에 의해 정려(旌閭) 를세웠음. 회귤의 효성(懷橘之誠)이라 칭찬하였다. 형편이 어려워 국, 밥그릇이 자주 비는 것을 걱정하여 손수 그물을 짜서 아침에는 상천(上川)에서 저녁에는 하천(下川)에서 고기를 잡아 아침저 녁 식사를 받들며 비바람을 피하지 않으니 고기잡이 하는 사람 들이서로그물을거두어자리를양보하였다. 아버님이 평일에 산약(山藥)을 좋아했으므로 기제사 날을 당 할 때마다 비록 눈 속에서라도 캐어서 쓰니 마을 사람들이 감복 하여가만히엿보니까가을에잎이떨어질때나무를꺾어서그 산약이있는곳을표시를해두었고그것을캘때에는땅도그를 위해얼지않았다. 을사년(1725년)과 정유년(1777년)의 국상 때에는 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면서 곡을 하였고 3년 동안 흰옷을 입었다. 암행 어사가이고을에들어오면먼저박효자집을묻고는친히조사 한후에쌀과고기를내려봉양을도와주었다고한다. 효자수은공의동생매와공(梅窩,휘泗)은시문에뛰어났다. 송암공의 11대손 규환(圭煥,號 夷南)은 당대의 석학 만성 박 치복(영동정 后) 선생을 비롯한 명현들과 교유하고, 평생 후학 을 양성하는데 매진하여 배우려는 학동을 다 수용하지 못할 정 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선조인 송암,황암공의 문집을 정리 하고 재사(齋舍)를 마련하여 선조를 기리고 학문을 가르치는 장소로삼았다.이남집(夷南集)이있다. 황암공 휘 제인의 손자 농은공(農隱公) 휘 도원은 여헌 장현 광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여헌이 말하기를 ‘공의 학문은 진실로 범상한 선비가 아니니 어찌 감히 업신여기겠는가?’라며 비록 제자이지만 그 범상함을 알고 공경하였다. 병자호란에는 분개 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였으며,만년에 백이산 아래 서실을 지 어 쌍학농은(雙學農隱)이라는 편액을 걸고는 두문불출하고 스 스로 절개를 바꾸지 않는 등 조부 황암공을 이어 도학으로 이름 을 떨쳤다. 증손(曾孫) 임(恁, 竹庵公)은 효종(孝宗) 때 무과 (武科)에 급제하고 수문장(守門將)과 훈련원 주부(訓鍊院主 簿)를 거쳐 전라우도 우후(全羅右道虞侯)를 지냈으며 숙종(肅 宗)때 거제 부사(巨濟府使)로 나가 치적(治績)을 올렸고,그의 아들 임(恁)의 증손 함 (涵 ) 의 호 는 봉 훈 재(奉訓齋), 타고난 효행으로 어버이의 뜻을 기쁘게 하였 고, 장성함에 이르 러 학문이 뛰어나 황암, 농은 두 할아 버지의 학업을 잘 이어받은 대학자로 성 장 하 여 학 풍 을 크게선도하였다. 봉훈재의 아우 영모재(永慕齋, 휘 한)의 아들 동후(東 , 明 谷公)는예학에밝아각종예서를발간후학들의길잡이가되었 다.이렇듯 집안 대대로 절의를 숭상하고 관직에 나아가서는 청 백함으로 일관하고 뛰어난 학문과 예학으로 지역의 문풍을 일 으키고 선도하면서 지역의 토호세족으로 자리 잡아 시집온 며 느리또한이에순응하여효열부가많았다. 특히 열녀 상산김씨, 함안조씨, 월성최씨가대표적이다. 열녀 상산김씨는 송암공의 5대 손 휘 문중(文重)에게 시집와 남 편이 병에 걸린 7년 동안 정성을 다했고, 집이 원래 가난하여 문전 의 논 2단(段, 12평)이나 때마침 극한 가뭄으로 온 고을이 거둘 것 이 없게 된 때에 병간호하는 여가 에 논 가 운 데 그 냥 앉 아 하 늘 을 향 해 울부짖기를 ‘이 농사를 한번 실 농하면 병든 남편이 무엇으로 호 구(糊口, 겨우 먹고사는 말)하겠 습니까?’ 하니 갑자기 그 논에만 비가 내렸으므로 사람들이 다 공경하고탄복하였다. 남편 돌아가신 날 염습하는 옷과 이불을 손수 재봉하여 3일 만에 성복하고 그날 밤 통곡 성실하면서 앉은 채로 목숨을 마쳤 으니이사실을조정에서알고정려가내려졌다. 열녀 함안조씨는 황암공의 6대손으로 효자 봉훈재공 휘 함 (涵)의 부인이다.충의공 조종도 선생의 6대손으로 절개를 지킨 행위가 뛰어났다.남편이 죽던 날에 같은 무덤에 들어가기를 마 음속에 맹세하고 초종(初終)에 쓰일 여러 기구를 지성껏 준비 하여조금도유감없이하고장사할날에이르러제수를손수일 일이 마련한 후에 그 아들을 불러 머리를 감고 묶으면서 천연스 럽게 위로하고 가르치기를 ‘너의 아버님 뜻을 이어 가문의 명성 을 떨어뜨리지 말라’하였다. 그날이 어두워지자 빈소에 들어가 서 나오지 아니함으로 놀라서 가보니 이미 관을 안고 조용히 자 살한후였다. 열녀 월성최씨는 송암공의 8대손 사묵(思默)의 부인으로 앉 은뱅이 남편을 위해 낮에는 약을 구해 치료하고 밤에는 자기 몸 으로 남편을 대신하기를 하늘에 빌었다. 마을 사람들이 몰래보 니 하늘에 기도하는 밤에 큰 호랑이가 곁에 쭈그리고 앉아 으르 렁거렸으나부인은조금도두려워하는기색없이밤새도록성심 껏 기도하니 호랑이가 곧 떠났고, 하루아침에 남편의 병이 쾌차 하여 8년의 앉은뱅이가 우뚝 서 걸었다. 남편이 장흥에 살면서 고향을 떠나온 것을 한탄하면서 항상 눈물을 흘렸고,임종 때 고 향에 반장할 것을 유언하고 남편이 죽으니 가난한 살림에 인부 를구할수없어시신을머리에이고어린아이를이끌고몇일동 안 걸었는데 머리는 부어오르고 아이는 피를 토하므로 부인이 통곡하면서 하늘에 기도하니 모자의 아픈 데가 다 나았다. 아침 저녁으로 밥을 빌어서 상식을 올렸고, 밤에는 한데서 슬프게 통 곡하니 가게 사람으로서 듣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 이 없었다. 마침내 조금씩 걸어서 함안 평광에 도착하여 선조들 의 묘소가있는선산에 매장하고 3년 동안시묘(侍墓)하였다.부 인 최씨의 열행(烈行)은 위로는 하늘을 감동시켰고, 아래로는 사나운짐승을감동시킨만고(萬古)의열녀임이분명하다. 명관리 저작공의 후예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는 분연이 일어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그 대표적인 인물이 송암 선생의11대손상엽(尙燁)이다. 공은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통치권을 빼앗기고 식민지가 되 자(庚戌國恥)동지를규합하여지하운동을전개하였고,64세의 나이에 1919년 3.1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군북면 시장에서 일경 의 무자비한 발포로 인해 현장에서 순절하여 정부에서는 건국 훈장(제28650호)을 추서하였다. /글·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경남함안군군북면명관리맹동마을 경주박씨 뱚집/성/촌 탐/방 븮홍문관저작휘앙선조께서수양대군이단종의왕위를찬탈하자수양산으로들어가절개를 지키고만년에함 안으로복거(卜居)한560여년세거지븣당대의석학들과교유하며함안지역의문풍을일으 킨유서깊은마을븯 경남함안군군북면명관리맹동마을전경. 뱚 ▶명관리지명유래 뱚 ▶ 입 향 개 요 추모재(追慕齋) 전경-경주박씨대표재실이다. 송암, 황암, 농은문집판각이 보관되어있다. 입향조박앙의묘소. 뱚 ▶입향조저작공(휘앙)의선원세계(璿源世系) 평천서원 유허비-추모재 앞에 있다. 평천서원은 함 안지역의 문풍을 크게 일 으킨 입향조의 현손 모암 공 희 삼과 그 의 두 아들 (송암, 황암)을 배향하였 으나 대원군의 서월철폐 령에의해훼철되었다. 뱚 ▶입향조이후가문을빛낸선조 황암정-황암공(휘 재인)의 재사(齋舍)이다. 선조 어필 ‘天寶山’과 묵화가 보관되었으나1993년2월도난당했다. 쌍학정-쌍학당(휘무)의재사이다. 수은공효자비-마을입구에자리하고있다. 상산김씨정려(효자각옆)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