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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7월31일 월요일 12 (제127호) 기획 화랑정신의 발상지로 잘 알려진 청도에 면면히 이어져 오는 호국 충절의 맥을 짚어보면 고려 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두문동 8절(節)로 꼽히 는송은(松隱)박익(朴翊)선생의후예,청도밀성박씨소고공파문중이있다.청도에입향한소고공(嘯皐公 )박건(朴乾)선생이래처사적삶속 에서 지역 백성들을 위해 애쓴 소요당(逍遙堂)하담(河談),성와(城窩)하청(河淸),병재(甁齋)하징(河澄 )삼형제,그리고 임진왜란 때 집 안 의 존멸위기에도 몸을 아끼지 않은 14의사에게로,충절의 마음은 뜨겁게 이어져 본보에서는 2015년 학국학진흥 원 한국학 학술대회 ‘조선 선비의 형 성과충절’에서박홍갑박사(국사편찬위원회)의『청도밀성박씨소고공파가문의내력과활동』원고를인용 하여다루어보고자한다. △서론 △소고공박건선생의가계 △소고공박건의청도입향과정착과정 △사림세력성장과소고공파후예들 ▶<지난호에 이어....>박하징에게서 백형 소요당 과 삼족당 김대유는 늘 함께하는 벗이자 스승이었 는데, 소요당이 82세, 삼족당이 73세의 일기로 생 을 마감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거의 한 평생을 같이 한동지이기도했던셈이다.그리고연하인남명조 식이나 퇴계 이황과의 교류 역시 박하징 혼자 보다 는 형제들이 함께 한 적이 많았다. 남명이 곽순을 대동하고 청도를 방문하였을 때 함께 어울렸다거 나, 형제가 같이 남명을 방문한 것에서 그들의 공 동교류가잘나타난다.특히박하징형제가조식을 방문하였을 때 이별의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지은 조식의시에서그들의교류관계는극명하게드러난 다. 특히 박하징 문집에서 보이는 퇴계와의 편지글 에서 그의 진정한 도학 탐구 자세와 학문적 경향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런 교류로 인하여 박하징의 외아들 박적이 퇴계 문인록에도 올랐다고 보여진 다. 뿐만 아니라 박하징 형제는 경기도 파주에 있던 청송 성수침을 방문하여 성리학에 대한 갈증을 해 소하기도 하였다. 성수침은 아우 수종(守琮)과 함 께 조광조의 문인으로 현량과에 천거 되었다가 기 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단념하고 어머니 고향 인 파주 牛溪에서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 불출하였다. 이때부터 경서 공부에 전념하여 도학 사상을 부흥하였는데, 그의 문하에서 아들 혼(渾) 을 배출함으로서 기호학파의 연원이 되기도 했다. 성수침은 박하징 보다는 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형제가 나란히 파주까지 내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교유관계는 지역과 연령을 초월한 것이었 음을알수있다. 아울러 박하담이 주세붕과 선산의 송당 박영(규 정공 후 찬성공 후예) 등 경상도 북부지역 인사들 과 교류한 사실들도 기록으로 남아있고,또 박하징 이 충주 사림을 영도하던 탄수 이연경은 물론이고 을사사화 여파로 일어난 양재역벽서 사건에 연루 되어 강계로 유배된 이언적에게 자주 안부를 묻는 서찰과 약재까지 보내주는 등의 성의를 다하고 있 었다는 점에서 이들 형제들의 교류관계는 인근 영 남지역 인물들뿐만 아니라 기호지역 학자들까지 광범위하게이루어졌음을알수있다. 박하담을 비롯한 3형제의 학문관이나 처세관은 김종직·김일손 등으로 이어지는 영남사림파의 전 통 위에서 성장한 것이었으며, 사화기라는 당시의 정치현실을부정적으로인식하고출사를단념하고 향촌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았지만, 단순한 현실 은둔자는 아니었다. 여느 사림세력들이 그러하듯, 사창이나 향음주례 등을 적극 보급하는 한편, 처사 적 삶을 살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성리학 이념을 실천해 가면 서도 불교나 노장사상에 경도된 모습을 보였으며, 무예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박하담 형제는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가 되었던 조식과는 특별히 깊은교분을형성했다.남명조식이중시한義사상 때문에 경상우도 지역이 임란을 당하여 의병운동 의 중심지가 되었듯이, 박하담 형제의 후손들이 주 로 무과로 진출한 것이나 임진왜란을 당하여 적극 적으로 의병활동에 나선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 다고본다. 조선후기소고공파위상과종족활동 4대 사화기를 거쳐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정치 가 이루어졌으나, 미증유의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전 국토가 유린되었다. 약 200년 동안의 평화가 지 속되는 가운데 전쟁 준비에는 자연히 소홀하게 되 었으니, 왜적이 쳐들어 온 선조 25년(1592) 4월 13 일에 부산이 함락되고, 이튿날 동래성까지 적의 수 중에 들어가 17일에는 밀양,20일에는 청도까지 함 락되고말았다.이렇듯밀양과청도가일찍적의수 중에 들어간 것은 적들이 한양으로 진격하는 중요 한 길목이었기 때문인데, 순찰사 김수는 후퇴하여 진주성에 머물렀고,청도 군수 배응경은 적을 피해 청도와 대구 경계에 있는 최정산에 숨어버렸고,좌 병사 이각은 병사를 거느리고도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우병사 조대곤은 웅천에서 싸워 패배한 장수가 되었으니,삽시간에 영남의 울산 언양 이북 의6~7개읍이적의수중에들어가고말았다. 이에 청도의 재지사족들은 스스로 의병을 조직 하여 적을 격퇴시키는 수훈을 세웠는데 그 중에서 도 밀양박씨 소고공파 일문에서 선도한 공이 컸다. 즉, 후일 14의사로 명명된 의병들은 주로 소요당 박하담 손자들이 중심이 되어 운문산 일대에서 창 의의 깃발을 올려 청도 읍성 탈환의 공을 세웠는 데, 이들은 모두 부자·형제·숙질·종형제 사이이다. 이 가운데 11사람은 선무원종공신 1~3등에 각각 등재 되었고, 한 사람은 병자호란때 진무원종공신 1등네 녹훈되었으니, 이러한 경우는 타 가문에 찾 기어려운매우희귀한예라하겠다. 이렇듯 공신책봉을 통해 정치사회적 기반과 경 제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된 소고공 후예들은 청도 지역을 영도하는 재지사족으로서의 위상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예컨대, 임란이 끝난 후 청도 사찬읍지 간행을 주도한다거나, 유향소를 통해 그 성세를 확인하는데도 적극적이어서, 그 결과물들 이『오산지』나 17세기에 작성된 청도향안에 잘 나 타나 있다. 우선 청도 사찬 읍지『오산지』의 항목에 서부터<표1> 그런 사실들을 엿볼 수 있는데, 밑줄 친 2 0 개 편 목 은 모 두 「學 官 」편 을 보 충 하 기 위 한 것 으로,〈鄕校〉와 〈자계서원(紫溪書院)〉으로 나누어 져 소개되어 있다. 자계서원은 1578년(선조11) 탁 영 김일손을 봉안하기 위해 설치되었다가 1615년 (광해군 7)에 節孝·三足堂 두 선생을 함께 봉안하 고있던곳이다. 따라서「삼선생봉안문」을비롯한20개편목은주 로 김해 김씨에 대한 것들이고, 그 중에서 「仙巖鄕 賢祠」「鄕賢祠移建仙巖記」「逍遙堂先生行蹟」「三 足堂贈逍遙堂詩」등은 소요당 박하담에 관련된 내 용이다. 삼족당 김대유와 박하담은 중종조 사림세 력들 힘이 꺾이자 운문산 아래에서 평생을 함께 한 동지였고, 선암사(仙巖祠)는 두 선생을 모시는 사 당이었기에 「소요당선생행적」등과 함께 편목으로 잡혔다. 따라서 『오산지』편목 을 보면 청도를 대표하던 김해 김씨와 밀성박씨의 행적들을 집중적으로 부각하고 있는데, 김해김씨는 구세력이었던 반면 밀성박씨는 신세력으로서의 위 상을반영한것이었다. 원래 청도는 토성 세력이 강 하여 중앙에서 파견되는 수령 이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이었 음이『고려사』에도 나타나지만, 특히 고려말기에는 청도김씨의 세력이 매우 왕성했다. 고려 후 기 에 사족으로 성장한 청도김씨 일파는 개경으로 이주하기도 했지만, 재지 일파는 사족과 이족으로 분화되어 갔다. 그런데 청도 지역에는 조선이 건국 된후본읍의토성들은침체된반면타지역에서이 주해 온 가문들이 재지사족으로 성장하여 일향을 영도하는현상을보여주고있다. 특히 고려 말에 청도에 이주한 김해김씨는 탁영 김일손과 삼족당 김대유와 같은 명환을 배출하여 청도 지역을 영도하는 가문으로 부상하였고, 밀성 박씨 소고공파 또한 세종집권기를 즈음하여 청도 로 이주해 온 이후 착실하게 재지적 기반을 다져나 갔다. 그럼에도 15~16세기 청도지역에는 김해김씨 성세가 크게 앞서고 밀양박씨가 그 뒤를 잇는 형국 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작성된 청도지역의 향 안을 분석하면 김해김씨는 쇠퇴해 간 반면 밀성박 씨 소고공파가 청도 재지사족을 주도해 간 형국으 로변해갔다. 향안이란 조선시대 지방자치 기구인 유향소를 운영하던 鄕中士類들의 명부인데,여기에는 世族· 右族등으로불리던양반사족들만이입록될수있 었고,향안에 입록되어야만 좌수·별감 등의 향임에 도 선출되고 지배신분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입록 자격으로는 친족은 물론 처족과 외족까지 포함된 족계가 분명해야 되고, 반드시 문벌세족이어야 하 였다. 그리고 가계는 물론 본인에게도 허물이 없고 품행이 뛰어나야 했다. 허물이란 본인 및 내외족계 안에 천계(賤系)또는 범죄 흔적을 말한다.입록 절 차또한까다롭다.향원들이추천을하면충분한토 의를 거친 후 권점(圈點)을 통해 결정하기에, 매우 엄격하게관리되었음을알수있다. 따 라 서 1 7 세 기 청 도 지 역 양 반 사 족 층 은 『淸 道 鄕 案正名錄』에 거의 망라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171 2년 이광절에 의해 편찬된 『청도향안정명록』은 목 활자본이며, 17세기 전반에 작성된 『淸道鄕案正名 錄』과 후반에 작성된 『淸道鄕案正名錄』으로 구성 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 청도에 산재한 재지사족들 의 명단이 이 향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셈인데, 청도 지역의 향권을 이해하는데 매우 소중한 자료 이다. 이들 향안을 토대로 하여 각 시기별·성관별 입록지를 분류해 보면 밀성박씨와 고성이씨 비율 이 약 57%에 달하고 있다. 즉 고려 말 성세를 보인 청도김씨를 비롯한 토성들이 절멸한 상태였고, 조 선전기에 큰 세력을 형성한 김해김씨 역시 크게 쇠 락한양상이다.대개연산군이후연속되는사화등 정치적 혼란 속에서 지방 재지사족 역시 큰 영향력 을 받았다. 이는 청도지역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김해김씨는 무오사화로 죽음을 당하거나 전라도 등지로 이주해 갔던 후손들이 많았고, 고성이씨는 사화를피해새로이청도로입향한경우이다. 이 시기의 청도 향안 入錄者 184명 중 밀양박씨 가 58명을 차지하고 있는데,여기에는 계파를 달리 하는 소고공파 46명과 밀직부사공 后 두촌공(입향 조 朴揚茂)12명으로 구분된다.밀직부사공 후손들 은 이서 신촌마을을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아무 튼17세기전반인향안을통해본청도향촌세력위 세는 소고공 후손과 고성이씨 중심이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 밀 양박씨의향권주도세는더욱두드러진다. 17세기 이후에는 각 지역별 향촌사회 질서가 크 게 재편된 시기이기도 한데, 여러 원인 중에서 가 장 큰 것이 왜란과 호란이었다. 앞에서도 언급되었 듯이, 청도지역은 소고공파 문중에서 박경신을 비 롯한 14명의 의병장이 배출되어 고을을 지켜냈고, 임 란 후 이 들 이 공 신 으 로 책 봉 되 면 서 그 성 세 는 더 욱 커져갔다.당시의 공신 책봉 상황을 보면,1등공 신 박경신을 비롯하여, 2등공신 박경전·박경윤·박 지남·박린·박철남·박근, 3등공신 박선·박한·박구· 박숙 등 모두 11명이 선무원종 공신으로 책록 되었 고, 여기에 누락되었던 박우는 振武原從功臣으로 책봉 받았다. 그리하여 소고공 후예들은 임란 공신 책봉을 바탕으로 향내의 향권 장악은 물론이고,각 기 지파별로 위상을 더 높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위 선사업에뛰어들었다. 18세기에 접어들고 부터는 경향 각지의 어느 문 중 할 것 없 이 조 상 현 양 사 업 에 너 도 나 도 뛰 어 들 던 시기였기에, 변무록·창의록·동고록·충효록 같은 자료가 쏟아지던 시기였고,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 에서 소고공 후예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란 당시 충의로 싸운 인물을 현양하기 위해 『충효록』이나 『박씨충효록』이 편찬되었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고종4년(1867)에 최종적인 결과물인『십사의사록』 이 간행될 수 있었다. 『십사의사록』은 기존의 관찬 사료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야사에서 결여된 임진 왜란 당시의 지역전투 상황과 전쟁극복에 대한 구 체적인 실상을 소상히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보존 가치가 높은 자료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효록』은 1797년(정조21)에 간행된 것이고, 『박 씨충효록』도편찬자박정상의생몰년을 볼 때 1800 년 이후에 편찬된 것이기에,당대의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에 사실성 이결여된다는평가를받고있기도하다. 이는 임란 당시부터 ‘14의사’란 명칭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 의해 추승되는 과정에서 만 들어진 용어이기 때문인데, 이런 결과물이 도출되 기까지는 지난한 과정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 대에 공신 반열에 오르지 못했던 박경선과 박경인 2인의 추증은 곧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왕조실록 에서는 증직을 내렸다는 사실만 전하고 있는데,문 중 기록에 의하면 박경인은 사헌부 지평,박경선은 좌승지로내려졌던것으로파악된다. 그러자 공신으로 책봉되긴 했지만 증직을 받지 못했던 인물들에 대한 추증 노력을 경주한 결과 박 경신·박경전·박경윤 등에게도 각각 증직이 내려졌 는데, 문중 기록에 의하면 박경선이 형조참판, 박 경전이 병조판서, 박경윤이 병조판서를 비롯하여 박선이 승지로, 또 진무원종공신으로 책봉 받았던 박우까지호조참의로증직되었다고한다. 이 리 하 여 임 진 왜 란 이 일 어 난 지 약 2 0 0 년 이 더 흐른 19세기 초반에 와서야 이미 공신 책봉을 받은 12명에다 순조 12년에 증직 받았던 경인·경선까지 포함한 14명의 임란의사를 최종적으로 확정 보게 되었다. 세칭 14의사로 알려진 임란 공신들은 이렇 게 확립되어 갔고, 이들의 위패를 모시는 祠宇가 필요하게 되자, 순조 32년(1832)에 이서 학산1리 소재 용강재 경내에 충렬사라는 사당을 건립하였 다. 이런 작업들은 소위 섶마리박가(청도 금산 신 지)와 보리미박가(청도 이서 학산)라 칭해 지는 소 요당 박하담 후손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선대였던 송은 박익이나 우당 박융,그리고 소요당 박하담의 문집을 집중적으로 간행한 것도 이 시기였고,족보 편찬역시이런것들과연관되어있었다.즉신유보 (1741)가 판각되기 이전인 1719년에 이미 기해보 가 육필로 성책되어 있었고, 1804년 구갑자보, 186 5년 병진보, 1924년 갑자보 등으로 이어지는 동안 에도 크고 작은 보송(譜訟)의 갈등도 겪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병재공 박하징 후손들 또한 병재의 유 문들을 수습하여 문집을 간행하거나 명동서사(청 도이서수야)라는사우를건립하기에이르렀다. 아무튼 이런 와중에 종조내부의 갈등이 나타나 기도 했지만,이는 소고공파 문중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시 양반사회에서는 흔한 일상이었다. 이 를 국사학계에서는 향전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각 문중마다 향전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지 않은 가 문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안동지역 의 병호시비는 물론이고, 경주의 여주이씨(이언 적)와 경주손씨(손중돈) 문중간의 손이시비, 한강 정구 문중과 여헌 장현광 문중간의 치열했던 한려 시비등크고작은시비가끊이질않았던것이바로 그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밀양박씨 소고 공파 역시 청도 관내의 김해김씨와의 향전을 통하 여 그 성세를 확보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동시에 종족 내부의 갈등까지 첨예하게 노출되곤 했지만, 이는 곧 우리 역사상 조선후기 종족활동의 한 흐름 으로이해할수있다. 맺음말 청도는 경상 좌·우도의 중간이기도 하지만 남북 으로도 중간지점이다. 이는 자유로운 지리적 여건 인 동시에 타 지역과 교류하기 편한 면도 있다. 따 라서청도지역에세거하던밀성박씨소고공파들의 종족 활동은 대내외적으로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 었다. 소고공 박건의 조부 박익은 밀양 재지세력으로 고려말 예조판서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4형제중 맏이 박융이 경상도 도사를 역임할 당시 청도와 자 주인연을맺었다.이에따라당시청도에정착해있 던 광산김씨 판서공 김성철의 딸을 그의 둘째아들 박건과 혼인 시키게 되었다. 아무튼 소고공 박건은 혼인을 계기로 청도로 이주하게 되었고,그의 외아 들박승원또한딸만셋을둔경절공하숙부의사위 가 되면서 청도 수야의 광활한 땅과 재산을 물려받 았다. 박승원 아들 3형제 이름에 河자를 넣은 것은 외가를잊지말라는뜻이었다. 이처럼명당으로이름난청도수야일원을우리나 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동족마을로 만들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물론 박승원의 아들 3형제가 사림으로 활동기반을 넓혔다거나, 또 그 후손들이 임란을 당하여 의병에 투신함으로써 활동영역을을 넓혀갔기 때문이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후 손 들 의 활 동 역 시 이 미 미 루 어 놓 은 선 대 의 사 회경제적토대가있었기때문에가능했던것이다. 이어 소고공 후손들은 임란을 당하여 14명의 의 병장을 배출하면서 청도 고을을 지켜냈고, 이를 바 탕으로조선후기부터한말에이르기까지재지사족 으로서의다양한활동들을펼칠수있었다.즉서원 건립, 족보와 문집편찬 등 위선사업에 힘을 쏟는 한편 해동속소학과 같은 교과서 편찬사업은 물론 이고,나아가 다른 종족과의 적극적인 향전을 통하 여자신들의입지를굳혀갔다. 이같이 밀성박씨 소고공파가 조선후기에 들어와 다양한 종족활동을 펼쳤다는 것은 입향조 이래 재 지적 기반을 굳건히 하여 성공적으로 정착하였기 때문인데,우리나라 동족마을 중에서도 가장 큰 규 모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것도 여기에 기인한 것이 며, 아울러 타 문중에 비해 학계의 연구결과가 매 우풍부한것도그러한이유때문인듯하다. 조선선비촌청도군이서면수야리의소 고공박건후예들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암서원-경북청도군금천면신지리.삼족당김대유와소요당박하담을향사하기위해건립한서원이다.초창은1568년(선조1)으로 ,매전면에있는운수정에두사람의위패를봉안하고향사하여 향현사라하였다.이후1577년(선조10)에청도군수황응규의주선으로사우와위패를현재의위치로옮기고선암서원이라개칭하였으 나,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지금 의건물은1878년(고종15)에박하담의후손들이다시중창하여오늘에이르고있다.서원에는14의사판목등귀중한자료가있으며주변 에는소요당선생의채취가서려있는소요대등이있다. 월호재(月湖齋)-청도군금천면신지리.성와박하청선생을배향한곳이다. 명동서사(明東書社)-이서면수야 리명동마을.병재박하징선생을배향한곳이다. 14의사비각-청도용강서원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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