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page

2017년6월30일 금요일 9 (제126호) 종합 蘆江 朴 來 鎬 ▲全南長城出生 ▲본보자문위원 ▲長城筆巖書院선비학당학장 ▲성균관부관장 反 求 其 身 (반구기신) 실패의원인을자신에게되돌려서구하라 는 것. 본 사자성어(四字成語)는 자사 (子思)께서 중용(中庸) 제14장을 마무리 하면서 인용한 공자(孔子) 의 말씀 ‘사유사호 군자 실제정곡 반구제기신(射有似乎 君子、失諸 正鵠、反求諸其身)’ 이라는 원문 마지막 글 구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원문을 설명 하자면 활쏘기는 군자(君子)에 비슷함이 있으니 따 오기 눈동자를 적중하지 못하면 자 신에게 되돌려 구하라는 뜻이다. 이는 공부하는 우리 모두가 참다운 선비가 되는 큰 공부이기에 논어 위령공(論語 衛靈公) 편에서도 군 자(君子)는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 고 소인(小人)은 남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라고 했으며 맹자 공손추 (孟子 公孫丑)상편에서도 ‘인자 (仁 者 )는 활 을 쏘 는 사 람 과 같 다 ’ 고 한 것 은 활 쏘 는 사 람 은 자 기 를 바로잡고 난 다음에야 쏘는데 쏘아 서 맞추지 못하여도 자기를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돌이켜 자기 에게서 원인을 찾을 따름이다. 라 고 하였다. 다시 설명하자면 인인 군자(仁人君子)는 모든 일의 책임 을 자기 스스로 지고 분수를 지킨 다는 것으로 이것이 곧 중용(中庸) 의도리라는것이다. 지난 19일은 우리고을 장성향 교 44대 이권한 전교 별세이후 보 궐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일찍이 필자의 족형 춘곤 승문회장님을 비 롯 전 춘추회장 심정섭님, 노인회 장 반강진, 문화원장 공영갑, 바르 게살기 정종연 회장, 장성의 참선 비 양희택, 나천주 김만원님과 이 충원 향교사무국장 등등 많은 유지 분들이 필자를 투표 없이 추대 하 자는 목소리를 높였으나 한 분이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하자 몇 분이 양보하라는 권고가 있었건만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이분들이 필자에게 선거등록을 권고하자 필 자는 뭇 유림들의 추대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선거등록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며 완고히 거절을 하였 다. 거절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유림의 지도자인 향교 전교를 선거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 나의 본래 철학이라는 것이고 또는 성균 관 부 관 장 을 지 낸 내 가 지 방 향 교 전교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은 성균 관 관장단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또는 패자의 뒷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마음이기에 등록을 하지 않 는다는 사유를 밝히면서 필자의 추 대를 위한 몇몇 분들의 모습을 지 켜 본 나의 기분은 전교에 당선한 것보다 더 기쁘다는 것을 이충원 국장에게 밝혔다. 본 선거는 5일부 터 등록이 시작되어 결국 두 분이 등록을 하여 선거를 치르게 된 것 이다.이날 10시30분 선거관리위원 회는 선거에 앞서 원로들에게 후보 들을 위한 격려와 귀감이 되는 말 씀을 들려주는 시간을 만들었다. 전 중앙유도회장 변온섭님의 보금 같은 말씀에 이어 필자는 사회자의 소개를 받고 앞에서 밝힌 공자의 말씀을 들려주면서 궁사(弓士)를 비롯체육인들도시합이끝나면상 호간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시하는 데 이 의식이야말로 승자는 패자의 마 음 을 위 로 하 는 것 이 고 패 자 는 승 자에게 승복한다는 마음이 담긴 것 이어서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 무 (武 )를 중 심 으 로 한 체 육 인 들 도 이 렇 게 마 무 리 를 하 는 데 더 구 나 이 날 행사는 문(文)을 중심으로 한 지도자를 선출한 것이니 승자와 패 자가결정되면상호간예의를 갖추 고 현재 보다 미래를 위한 화합의 모습을 보여 줄 것을 당부하였다. 필자는 이번 선거 기간을 지켜보면 서 족 형 춘 곤 님 을 비 롯 몇 몇 분 들 이 주신 뜨거운 사랑에 감사를 느 끼는 한편 사랑의 빚을 짊어졌다는 생 각 을 갖 게 되 었 다 . 20일에는지난번우리신문에한국 의 유교 전통,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특별 기고를 해 주신 오세인광주고검장과신임유상범차 장검사님의 오찬 초청이 있어 학정 이돈흥 원장과 참석 음식을 함께 하 면서 유교계승을 위한 많은 의견도 주고받았다. 23일에는 전남 담양군 창평면 경동길에서 거행된 제3회 광 주전남 조선 오난(五亂) 충의사(忠 義士) 추모식 제사에 현창회장 이영 복님의초청이있어명곡선생의후손 오락균선비와동참수많은회원들과 함께엄숙한가운데충신열사들의얼 을 새기면서 제사를 모셨 다 . 아아~ 이번 전교 선거에서 고배 를 마시게 된 필자의 벗을 비롯 21 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국민 모두가 매사의 경쟁에 있어 결과에 승복하고 실패의 원인을 자기에게 서 찾아라는 공자의 가르침 반구기 신(反求其身)의 정신으로 살아갔 으면한다. ■蘆江 先生의 漢字 이야기 三伏奇蹟結氷谷(삼복기적결빙곡) 奇想寒료噴氣所(기상한령분기소) 한여름눌러앉은 산내천골짜기에 땀씻는얼음물은 계곡에넘쳐나고 찬 서 리 고드름맺히니 삼복더위밀치네 ※초당박상진 1922년밀양生 前일성왕릉참봉 ‘문예춘추’ 등단(2013년) 얼름골(結氷谷) 초당박상진 박 종 부 동결견(오십견)이란 특별한 외 상없이 어깨에 통증이 동반되고 그 통증으로 인하여 어깨의 움직 임에 지장을 받는 증상을 말합니 다. 원인은 불분명하지만 주로 노 화와 운동부족이며 노화에 따른 어깨관절 주위 연부조직의 퇴행 성변화때문에발생합니다.그밖 에 어깨 관절의 부상이나 깁스를 풀고난후또는입원등으로장기 간 어깨 관절을 사용하지 못한 후 에도 발생되며, 어떤 경우에는 원 인 없이 발생하기도 합니다.(질병 백과참조) 오십견은 특별한 원인 없이 통 증과 함께 어깨의 움직임에 심한 제한을 받는 것이 특징입니다.의 학적으로 오십견의 원인은 아직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그 러나 인체파동원리로 볼 때 오십 견의 원인은 분명합니다.심장 때 문이죠. 여자분들은 나이가 50대 에 접어들면서 신체에 중대한 생 리적인 변화가 발생합니다. 바로 폐경입니다.나이 들면 누구나 찾 아오는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사 람의 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 니다.여자로서 가장 중요한 기능 을 상실했다고 여겨 그 기능을 되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뇌 가 과도한 반응 곧 오작동하는 것 입니다.뇌의 오작동의 결과로 각 종 갱년기 증상이 찾아오게 되고 심장은 갑자기 과도한 일로 인해 힘들고 지치게 됩니다.이로 인해 심장 주위 근육들이 긴장하게 되 고 연관통도 발생하여 결국 어깨 주위 근육들이 함께 긴장하게 됩 니다. 근육의 긴장은 어깨관절의 운동 부조화를 가져와 결국 오십 견이라는 병이 찾아 오게 됩니다. 또한 이상한 것은 그렇게 치료해 도 낫지 않던 어깨가 수개월 내지 수년이 지나면서 특별한 치료 없 이도 오십견이 점차 완화되다가 어느순간없어지게됩니다. 이는 폐경으로 인한 뇌의 과도한 반응 이 심장을 지치게 했다가 오작동 의 힘이 어느 정도 분산되고 균형 을 맞춘 결과로 심장의 과부하가 줄어 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 다.심장이편해졌으니어깨또한 편해지는 것입니다. 자궁이 없는 남자분들의 경우에도 오십견은 옵니다.그러나 과정이 좀 다릅니 다.남자분들은50대중반이넘어 서면서 사회적으로 퇴출의 위기 를맞습니다.명퇴와같은직장활 동과 사회생활의 위기는 가정을 짊어진 가장으로서 심한 스트레 스에 시달리게 되고 이는 심장의 압박을 가져와 여성분들과 같이 오십견이발생하게됩니다. 치료는 현대 의학에서는 보전 적인 치료 곧 약물치료, 물리치 료, 운동치료 등으로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으나 근본 원인 을 모 르 니 근 본 적 인 치 료 또 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체파 동원리에 의한 치료는 매우 간 단하고 빠릅니다. 단지 몇 번만 치료로도 완치가 가능합니다. 여자 분의 경우 폐경과 관련된 치료 곧 자궁,호르몬기관,심,장 목, 어깨 등을 파동원리에 따라 치료하면 아주 빠르게 치료 됩니 다.남자분들또한마찬가지입니 다. 어려 운 오 십 경 의 치 료 인 체 파 동 원 리 로 는 쉽게 치료 됩니다. 오십견(동결견) 의 학 상 식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자료제공:인체파동원리창안자박종부 문의:010-2336-7582 전남 담양 창평향교 신임전교에 박문수 현종이 지난 4월 25일 취임 했다. 1990년 창평향교에 입문한 박 전교는 장의를 거쳐 10여 년 간 총무를맡아청소년인성교육과향 교발전을위한유림회관건립계획 등을 추진하면서 지역 유림인들로 부터 신망이 두터워 이번 전교 추 대로이어졌다는후문이다. 박 전교는 취임일성으로 유림 인들 스스로 변해야 한다고 강조 한다. 100여명에 이르는 장의에 게주기적인경전강의를통해지 식함양으로 지역민을 동화(同 化)시키고,청소년들을대상으로 는 인성교육을 통해 우리 아이들 이 상호 배려하고 함께하는 공동 체적인 인성의 필요성을 깨우치 게 만들어 지역사회에 이바지 할 것이라고말한다. 그리고복원하지못한건물에대 해체계적인고증을거쳐복원하고, 추진중인 유림회관 건립으로 슬로 우시티 창평에 유교문화를 접목시 키는장기적인포부를덧붙인다. 창평향교는 설립 연대는 미상 이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뒤 중건하였다.현존하는건물 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성 전,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명륜당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 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 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 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 급 받 아 교 관 1 인 이 정 원 3 0 명 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 후신학제실시에따라교육적기 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 (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 에분향을하고있다. 소장전적은 판본 26종 159책, 사 본 4책 10권이 있는데, 이 중 븮유안 (儒案)븯·븮향중삼규 (鄕中 三規)븯·븮존성계속수안 (尊聖契 續修案)븯·븮현후사마선생안 (縣 侯司馬先生案)븯 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4호이 다. 창평향교신임전교에박문수현종취임 기성세대는유교경전을청소년은인성교육을통해지역사회에기여할터 박문수전교 박순구(맨오른쪽)청년회장을비롯한임원진이박희성부회장(오른쪽에서4번째)의 로타리클럽회장취임식에참석함께하고있다. 밀성박씨 전국청년회 희성 재 무담당부회장이 지난 21일 국제 로타리클럽 3722지구 창녕로타 리클럽제47대회장에취임했다. 박순구 청년회장을 비롯한 지 역기관단체장과클럽회원등300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녕읍 경 화회관 대연회장에서 가진 취임 식에서 박희성 회장은 회원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한 친화력을 바 탕 으 로 클 럽 모 든 행 사 에 회 원 들 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돕고 독려함으로서 더욱 열심히 봉사하고 클럽의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인 클럽 발전 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할 것 이라며취임포부를밝혔다. 박 회장은 1990년 로타리클럽 에 가입하여 꾸준한 봉사를 통해 지역민과 함께하여 왔으며, 주요 보직을 맡아 클럽 발전을 이루어 와 이날 취임으로 창녕로타리클 럽이더한층발전할것으로기대 를모은다. /박희순 명예기자(경남 창녕군 지부) 창녕로타리클럽제47대박희성회장취임 더열심히봉사하여클럽의위상을높일것 그릇을 씻다가 내 어머니를 생각하면,아침 저녁 끼니도 잇지 못할양식으로음식을준비 하시던 일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으니, 다 른사람도그렇겠는가?옷걸이를어루만지다 내 어머니를 생각하면 못쓰게 된 솜으로 늘 추위와바람을막아줄 옷을 다지어주시던 일 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니, 다른 사람도 나 와 같겠는가? 등불을 걸다가 내 어머니를 떠 올리면 닭이 울 때까지 잠 못 이루시며 무릎 을 굽혀 삯바느질하시던 모습이 생각나지 않 을 수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이런 경험이 있 겠는가? 상자를 열다가 어머니의 편지를 얻 어 자 식 이 먼 데 나 가 노 니 는 데 대 한 마 음 을 술회하시고 헤어져 있는 괴로움을 말씀하신 대 목 을 보 면 넋 이 녹 고 뼈 가 저 미 지 않 을 수 없어, 갑자기 차라리 몰랐으면 싶다. 손꼽아 어머니 연세와 내 나이를 세어보니 돌아가신 어머니 연세는 겨우 48세이시고 나는 24살이 니,슬피 머뭇거리며 소리를 놓아 길게 부르짖 으며 비 오듯 눈물 흘리지 않을 수가 없구나. [원문-滌器而思吾親, 未嘗不念其或爾或淡, 朝夕不繼之食矣, 他人其然乎哉? 撫 而思吾 親, 未嘗不憶其敗絮不完, 歷盡風寒之衣矣, 他 人其同乎哉?懸燈而思吾親,未嘗不想其김] <해설> 전주 이씨는 자식의 앞날을 위해 무엇이든 하리라 결심했다.서얼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 려서부터 가난과 차별을 경험한 아이들이었 다. 아이들의 아버지 우부승지 박평(朴 )은 둘째인 제가(齊家)가 11살 때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본가에서 나와 청교(靑橋), 묵동(墨 洞), 필애(筆厓) 등지를 전전하며 이사를 다 녔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남의 집 삯바느질 로생계를꾸려가는일이었다. 그럼에도 이씨는 자식에게 공부를 시켰다. 아들인 제가는 총명하고 똑똑했다.말수가 적 어 사람들과 잘어울리지못하고고집이너무 센 게 염려되긴 했지만, 어릴 때부터 입에 붓 을 물 고 다 닐 정 도 로 책 읽 고 글 쓰 는 것 을 좋 아한 아이였다.측간에 들어가면 모래에 그림 을 그리고, 앉기만 하면 허공에 글씨 쓰는 연 습을 했다. 열 살 무렵에 이미 『맹자(孟子)』 『시경(詩經)』은 물론 『이소(離騷)』 『진한문 선(秦漢文選)』 『두시(杜詩)』 『당시(唐詩)』 등을 읽고 스스로 비점을 찍을 만큼 남다른 재능을 지녔다. 어머니로서, 가난 때문에 아 이의남다른재능을썩힐수는없었다. 이씨는 동네 주변에 이름난 명사(名士)가 있 다는소문을들으면수소문을해서라도찾아내 집으로 초청했다.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차려 서 자식과 어울리게 했다. 덕분에 박제가는 당 시의 저명한 인사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푸짐한 상차림을 대접받은 사람들은 박제가가 가난하다는사실을전혀눈치채지못했다. 박제가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는 온전한 옷 을 걸쳐본 적이 없고, 좋은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다. 새벽까지 잠도 못 자면서 바늘 품을 팔아 자식을 공부시켰다.그와 같은 어머니의 눈물겨운 헌신 덕분에 자식은 훌륭한 문장가 로 성장해 갔다. 열일곱 살에 결혼도 했고 박 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이덕무(李德 懋), 유득공(柳得恭) 등 백탑(白塔) 주변 실 학자들과 어울려 공부하면서 북학(北學)의 꿈도 키워갔다. 그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을 꿈꾸며자신의길을걸어가리라다짐했다. 그러던 1773년 겨울,박제가가 스물네 살이 던 해에 어머니 전주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날마다 늦은 밤까지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리 다가 허약해진 몸을 이기지못하고끝내스러 진 것이다. 집안의 생계를 홀로 떠맡은 가장 으로써, 자식의 성공과 살아갈 방도를 위해 새벽까지 삯바느질하던 어머니는 자식의 성 공도 보지 못한 채 그렇게 눈을 감았다. 그때 이씨의나이마흔여덟이었다. 박제가에게 어머니는 가난한 엄마,자식 생 계 를 위 해 새 벽 까 지 잠 못 들 고 일하시던 엄 마였다. ‘다른 사람도 그랬겠는가?’ 라는 말 을세 번반복하는데 이르면 자식뒷바라지로 평생 고생만 하다돌아가신어머니에 대한정 한이몹시절실하다. 박제가는 어머니 유품을 열었다. 편지 한 통이 나왔다. 예전 멀리 나갔을 때, 몸조심하 라며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편지였다. 애타는 엄마의 마음을 읽자니 넋이녹고뼈가 저려와 차마 편지를 몰랐으면 싶다. 너무 일찍 떠나 가신 어머니 나이를 떠올리니 한스러움이 밀 려와,박제가는목놓아울었다. 윗글 「서풍수정기후(書風樹亭記後)」의 시 작은 이러하다.부모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세상의 온갖영화를누리며오래살다가 떠났 을 때, 그 자식이 남 못지않게 서럽게 운다면 사사로운 욕심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하늘 의 이치이다.그렇다면 부모가 나면서부터 가 난 속에서 굶주리며 이리저리 떠돌다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갔을 때, 그 자식이 남보다 서럽게 우는 것은 하늘의 이치일까? 그렇지 않다.사사로운 마음이다.골육(骨肉)의 마음 은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더하거나 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어머니 의죽음 앞에서 더한스럽고 사사로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고생하신 자신 의어머니를떠올릴때면남보다더욱 서럽고 더욱아프지않을수가없었던것이다. 예민한 감수성으로 자기만의 시 세계를 구 축한 시인 박제가. 조선 지성사에서 가장 많 은 외 국 인 과 사 귄 열 혈 남 아 박 제 가 . 그 러 나 이전에 그는 한 가난한 어머니의 자식이었다. 자식이 되어 가난한 어머니를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죄책감, 가난 가운데 고생 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움으 로박제가는울고또울었다. 이후 박제가는 중국을 다녀와 조선의 가난 한 현실을 타개할 방도를 제시한 『북학의』를 저술하고 최초로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발탁 되었다. 정조의 편찬 정책을 돕던 박제가는,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사돈의 옥사사건에연 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갔다.변방으 로 귀양 온 박제가는 자신의 가련한 처지를 빗대어 ‘흠 가진 늙은이’라는 뜻의 뇌옹( 릍 翁)으로 호를 바꾸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점을 치고 나서 “이름이 온 세상에 가득하지 만 몸 에 큰 흠 이 있 을 것 이 다 ”라 고 하 신 말 씀 을 기억하려 한 것이었다. 사랑이 깊어지면 꺼리던말도그리움이된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사랑이고 헌신이다. 여 든을 바라보시는 나의 어머니는 오늘도 흐릿 한한쪽 눈으로 새벽 어스름에 밭일을 나가신 다.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으로 자식은 이 험 한 세상을 잘 견디며 살아왔다. 비바람 부는 고단한 삶의 여정에서 몸소 우산이 되어주시 던 분이 나의 어머니이다.(한국고전번역원, http://edu.itkc.or.kr/)에서 옮김) ▲박제가(朴齊家,1750년11월5일~1815년4 월 25일)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 외교관, 통역 관,실학자로 북학파의 거두이다.자는 재선(在 先),차수(次修),수기(修其),호는초정(楚亭), 정유(貞否)또는정유(貞 찮 ),위항도인(葦杭道 人)이며,본관은밀성으로충헌공후예이다. /글쓴이 박수밀(朴壽密)한양대학교 인문과 학대학미래인문학교육인증센터연구교수 나의 어머니 초정박제가(조선후기의정치가,실학자) 중국화가나빙이그린박제가의모습(과천문화원소장.)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