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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6월30일 금요일 6 (제126호) 밀성박씨전국청년회 선조유적순례기 부산 사상구 학장동에 450여년의 오랜 토반으로 화목 한 종중상을 보여주고 있는 사직공파 학장문중의 재사이 다. 사직공파는 밀성박씨 삼사좌윤공(휘 을재)의 7대손으 로 대마도 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정국군 충의백 박위 장군의 손자이면서 야은 길재선생 문하에서 수학하고 출 사(出仕)하여 사한논사(詞翰論思, 詩와 詞, 문장을 論하 다)의 임무에 참여하고 박사(博士)로서 종학(宗學)을 세워 왕가의 자제를 가르친 소암(紹菴) 박효생(朴孝生) 선생을파조로모시고있다. 소암공은 왕가의 자제를 가르쳐 훌륭한 왕제를 길렀으 며, 이어 사직(司直)에 이르고 얼마 되지 않아 정2품 자 헌대부에 올랐으나 당시 정치상황이 언제 변할지 모르는 등 정국이 불안하더니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단종복위에 많은 대신들이 연루되어 처형되고 급기야 단종이 영월에서 우해(遇害)함에 공(公)은 사직 (辭職)하여 관(官)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3년간 복제(服 制)를 입으며 군신간의 예를 다하고, 동굴에서 기거하며 매년 기일에는 산에 올라가 종일토록 통곡하며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는 당시 사대부에게 알지 못하게 함이었으며, 사육신에 버금가는 충절을 보 인것이다. 학장문중의 입향조는 경남 김해 대동면 신암에서 이거 하여 초야(草野)에서 가학(家學)을 연마하는 포의(布 衣)의 선비로 임진왜란을 맞아 동래부사 송상현 휘하에 서 동래성을 지키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순절하여 조봉 대부 군자감주부에 증직되고 안락서원에 배향된 휘 인수 (仁壽)公으로사직공의6대손이다. 부산의 충렬사에 당시 함께한 24의사와 함께 봉안되어 충절을기리고있다. 사직공파 종중의 가훈은 선조의 유훈이 새겨져 있는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이다. 즉 “충과 효를 가문에 전하고, 어질고 공경하는 정신을 대대로 지 켜나가라.”라는뜻이다. 유교에서는 효를 모든 행위의 근원[孝者百行之源]이 라 하였다. 그리고 효(孝)는 숭조와 직결된다. 학장문중 의 후손들의 특징은 첫째도 화목 둘째도 화목으로 애종 (愛宗)을 실천하고있다. 학장문중의 종원들은 약 150여세대가 부산 경남지역 에 세거하면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매년 선조의 향사 일인 음력 10월 첫째 주 일요일 경모재를 찾는다.노소 남 녀 구분 없이 120여명의 종원이 참석하고 있으니 종원 대 사수가참여한다고보아야할것같다. 학장 문중의 종만 회장(前 경애왕릉 참봉)은 하루아침 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선조님이 물려주신 부동산을 지키며 오늘에 이른 것은 선대 어른들의 크나 큰노력의산실이라한다. 학장문중이 부산 구덕산 아래에 터를 잡은 지 대략 450 여년,그동안 선대 어른들은 종중을 위한 위선 사업에 눈 물겹도록 헌신하였다며 입향조 군자감주부 인수 공의 10 世 표(杓)자 항열 사촌 9명(남표, 호, 경, 극, 석, 광, 준, 작,죽,득,헌,진)형제분의일화를소개한다. 이들 아홉 형제는 잔칫날 모이면 밤새 막걸리 세통을 마셨고,가을 추수 후에는 모두가 함께 산으로 가서 땔감 나무를 하여 소등에 실고 구덕재를 넘어 자갈치 시장에 팔아 기금을 마련하여 학장동 앞산과 현재 구덕터널 근 처의 임야 수 만평을 구입하여 지금의 학장문중의 토대 를마련하였다. 학장문중의 부동산 임대수익금은 종원들의 복지증진 에 최대한 지원하고 있다. 만65세 이상 종원에 경로지원 금, 대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에게는 학자금, 신혼부부에 게는 출산장려금, 입원으로 수술을 받는 종원에게는 위 로금을 각각 지급한다. 그리고 매년 친목과 화합의 장을 열어하루를종원들과어울리는시간을갖는다. 밀성박씨사직공파학장문중경모재(景慕 齋) (부산광역시사상구학감대로39) 학장문중의경모사에서박순구회장이 분향하고있다. 경모사(景慕 祀)는 1895년 현 구덕터널 입구쪽에 최초 건립되었으나 1983년 터 널공사로 인해현재의위치로 이건되었다. 입향조조봉대부 군자감 주부(휘 인수)를 비롯한 81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음력 10월 첫째주 일요일향사한다. 학장문을 찾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뒤편 건물이 경모사이고 옆 건물이 재사경모재이다. 부산광역시동래구안락동山19-3(안락로99-5)번지에위치 하는 花田齋(화전재)는 月城(慶州)朴氏(월성박씨) 현감공파 (縣監公派)동래문중(東萊門中)의 근원지(根源地)이다. 월성박씨 대제학공(大提學公) 후(后) 현감공파(縣監公派) 는 통훈대부(通訓大夫) 당진현감(唐津縣監) 박숭겸(朴崇謙) 을파조로한다. 월성박씨 현감공파 동래문중의 재실 화전재터는 장산( 켁山) 의 일맥(一脈)이 완연기복(豌涎起伏)하여 동래성 東쪽에 이르 러 화개형상(花開形狀)을 이룬 곳이라 하여 옛 부터 화현(花 峴)이라불러지고명당(明堂)으로일컬어져왔다. 당진현감(唐津縣監) 박숭겸(朴崇謙)의 아들인 어모장군(禦 侮將軍) 박건(朴建)이 연산군의 학정(虐政)을 피(避)하여 순 유차(巡遊次) 동래(東萊)에 들렀다가 급서(急逝) 함에 두 아 들이 3年시묘(侍墓)하고그후동래에살게되었다. 중엽(中葉)에 현감공 박숭겸(朴崇謙)과 그 후손 5位(위)의 제단(祭壇)을 이곳 화전재 경내(花田齋 境內) 묘원(墓苑)에 설치(設置) 하였으며 어모공(禦侮公)의 증손인 훈련원부정 (訓練院副正)박경립(朴擎立)을 비롯하여 그 후손 10位(위)의 묘소를 이곳 경내로 이장하고 마침내 문중의 터전으로 1980年 에 화전재(花田齋)를 낙성(落成)하였다. 그리고 주위에 병원 ,상가, 아파트, 연립주택 等(등)의 사업 시설을(事業施設)을 배치(配置)하였고,매년 후손들에게 장학 금수여와경로연(敬老宴)을열고,기초생활보호대상자와소년 소녀가장지원, 출산장려금지원 等(등)의 사업을 시행하여 애 종 육영의 이념을 고취하며 추계제향(秋季祭享)을 올려 숭조 (崇祖)의정신을이어가고있다. 문루(門樓)는 보현문(寶峴門), 숭겸문(崇謙門)이라 이름하 였고, 웅장한 재실에는 화현산(花峴山) 전경도(全景圖), 인천 장아산 전경도(藏我山全景圖), 화지산 전경도(華池山全景圖) 를 걸어 선대의 분영(墳塋)에 소홀(疏忽)하지 못함을 강조하 였고, 육주(六柱)에는 연구(聯句) 月城靈氣下東山(월성령기 하동산) 根托花田振世間(근탁화전진세간) 千年華閥遺芳地 (천년화벌유방지) 百世淸風種德齋(백세청풍종덕재) 祖蔭遺 傳延世代(조음유전연세대) 山靈保護大家門(산령보호대가문) 를걸어가문의영광(榮光)을기원(祈願)하였다. 또 효자(孝子) 박인백(朴仁伯)과 그 부인 동래정씨(東萊鄭 氏)의 효자열녀비(孝子烈女碑)를 미남리(美南里)에서 이곳 경내로 옮겼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동래고보 졸업반 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고 난 후 계속하여 항일운동을전개한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박임 갑(朴壬甲) 기적비(紀績碑)를 세워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 설로(顯忠施設)로 지정(指定) 받아 후손들에게 충효(忠孝)의 교훈을고양(高揚)하고있다. 현감공파 후손이 동래 입향 약300여 년 동안 어모장군(禦侮 將軍), 절충장군(折衝將軍), 선략장군(宣略將軍), 가선대부 (嘉善大夫), 부사과(副司果), 별시위(別侍衛), 훈련원부정(訓 練院副正),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경상우후(慶尙虞侯), 칠 포만호(漆浦萬戶),동래진중군(東萊鎭中軍),겸사복(兼司僕), 두모포군관(豆毛浦軍官), 영수성군관(營守城軍官)등의벼슬 을이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출신 진사(進士), 찰방(察 訪)등으로활약하였다. 그 중 동래향안(東萊鄕案)에 무과(武科 ) 훈련원부정(訓練 院副正) 박경립(朴擎立)과 公(공)의 아들 절충장군(折衝將 軍) 중추부사(中樞府使) 박득화(朴得和) 손자 가선대부 용양 위( 嘉善大夫龍將尉) 절충장군(折衝將軍) 박진성(朴震成)이 잇따라 향안(鄕案)에 올라 향반(鄕班)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유림(儒林)에 출입하여 좌수(座首) 향교(鄕校) 도유사(都有 司),직원전교(直員典校),충렬사(忠烈祠사)안락서원장(安樂 書院長) 등 유림의 요직을 많이 거쳐서 현재에 이르렀다. 특히 박경립(朴擎立) 公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錄卷三等 條에登載)으로 어렸을 적부터 여력이 절륜(絶倫)하여 독서(讀 書)의 여가(餘暇)에궁마지술(弓馬之術)을익혔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헛되이 죽는 것은 국익(國益)이 되지 못한다.” 하고 당숙(堂叔) 박우춘(朴遇春, 宣武原從公臣錄卷二等條에副司果로登載)外여러 동지들과 의 병(義兵)을 일으켜 많은 전과(戰果)를 올렸다. 이에 1991年 9 月10日 부산시 문화재위원의 심의(審議)와 안락서원(安樂書 院) 원회(院會)의 의결(議決)을 거쳐 충렬사(忠烈祠)에 임란 (壬亂) 선무원종13공신(宣武原從十三功臣)과 합사(合祀)되 었다. 그리고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 現 金剛公園內 所在) 기 문(記文)에 의하면 선대(先代)에 동래읍성(東萊邑城) 축조 (築造)에 4名이 공사임원으로 하였다.즉 남소장(南所將)박민 성(朴敏聖,武科慶尙虞侯)북소장(北所將)박취하(朴就夏,座 首)일소장(一所將)박시한(朴始漢,漆浦萬戶)동래패장(東門 牌將), 박계특(平丘道察訪)이다. 또한 동래향교 경내 비석에 향교 이건(移建)시 감독으로도 활약하는 등 동래지역 토호세 족으로그의무를다했다할것이다. 월성박씨花田齋(화전재) 화전재전경. 화전재를 찾은 청년들에게 문중 박대종 상무이사가 문중의 내역과 화전재 를설명하고있다. 주산재는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산1 28-1번지에 있다. 인묵재(忍默齋) 박천 추(朴天樞) 공의 재사(齋舍)이다. 묘소 부근 임야 8천여평에는 인묵재공의 후학 양성의 유지를 받들어 종중에서는 학교 법인을 설립 현재 부산세무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고 학생들의 전통 예절 교육 장소로도활용되고있다. 인묵재 박천추 생생은 총제공 휘 덕공 의 5세손 박수(朴燧)가 기묘사화(己卯 士禍)로 성주(星州)로 가게 되고, 박수 의 현손이다.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동 래성 전투에서 분전하였으며, 성이 함락 당한 후에는 의병을 일의켜 7년 전쟁 내 내적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백성을구출 하면서 적의 수송로를 차단하며 혁혁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난(亂)이 끝난 후에는 학문에 정진하면 서 고을의 양속창달(良俗暢達)에 온힘 을다했다. 이에 고을에서는 선생의 행적을 기리 기 위해 충열사에 배향하여 매년 향사를 올리고있으며,또한선생의뜻을따르는 후손들이 후학양성에 뜻을 모아 학교법 인 인묵재학원을 설립하여 주산재를 현 대식 교육시설로 바꾸고 주산재 경내에 학교를 짓고 교사와 학생들은 선생을 사 표(師表)로모시고있다. 주산재 건물 뒤편에는 선생의 묘소가 중앙에 있고, 그 서편에는 선생의 선대 조상 4위와 동편에는 후손들의 단소 3위 가있다. 영추재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8 8-11번지에 있다. 장전초등학교 인근이 며장전동쌍용아파트뒤편이다. 부산 구서동에 세거하는 죽산 박씨 총 제공파 의재공 문중은 총제공(摠制公) 박덕공(朴德公)에서비롯된다. 박덕공은 고려 멸망을 예견하고 광릉 산(光陵山)으로 은둔하였는데, 후일 조 선 정조 때 개성 두문동(杜門洞) 표절사 (表節祠)에 모셔졌다. 박덕공의 5세손 박수(朴燧)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성 주(星州)로 가게 되고,박수의 현손 선무 원종공신 인묵재(忍默齋) 박천추(朴天 樞)가 동래 북면으로 이거하여 그의 후 손들은 이곳에 세거하게 되었다.죽산 박 씨 구서 문중의 입향조는 24세 박천추의 아들 박대회(朴大檜)로, 박대회의 아들 의재공(毅齋公) 박준(朴浚)이 구서동에 서태어나이후자손들이세거하고있다. 영추재는 의재공 이하 선조님의 재사 (齋舍)로 1980년대에 지금의 부산광역 시 금정구 구서동 588-1번지에 처음 건 립되었다.이곳에 구서동 쌍용 예가 아파 트가 들어서면서 2006년 11월 18일 영추 재는 지금의 위치로 다시 건립하여 이전 하였다.2013년 9월 4일에 요사채인 예희 당(禮喜堂)을건립하였다. 재 실 의 문 은 솟 을 대 문 의 형 식 인 선 덕 문(宣德門)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왼쪽 에 요사채인 팔작지붕의 예희당이 있다. 예희당은팔작지붕의정면3칸,측면3칸 건물로,전통목조양식의초익궁보머리 형식이다. 그 안쪽으로 계단에 올라서면 재실인 영추재가 있다. 영추재는 팔작지붕의 정 면 3칸,측면 3칸 건물로,전통 목조 양식 의갖은주삼포형식이다. 영추재 뒤편에 봉사하고 있는 조상의 설단이 있는데, 설단의 배열은 두 줄로 하였다. 정중앙 부분은 소목지서법에 따 라 박준을 수위로 왼쪽에는 박상운(朴尙 雲),오른쪽에 박문재(朴文在)의 비석이 있다. 바로 앞줄에는 이서위상법에 의해 박희곤(朴希坤), 박경일(朴慶一), 박내 종(朴乃淙), 박내연(朴乃演), 박민석(朴 敏碩), 박성홍(朴性洪)의 비석이 있다. 설단의 밑단은 영추재의 이전 기록이 새 겨져 있는 와비가 있다.대지 면적은 총 9 57㎡이다. 현 장손인 박정웅(朴正雄)의 11대조 에서 4대조까지 모시고 있다. 11대조 박 준, 10대조 박문재, 9대조 박상운, 8대조 박희곤, 7대조 박경일, 6대조 박내종과 박내연,5대조박민석,4대조 영추재는 부산 인근의 재실 중에서 전 통 적 인 형 태 를 갖 추 고 지 금 까 지 5 0 여 호 가 세거지를 이루며 향사를 하는 대표적 인 재실이다.그리고 재실의 표준을 제시 하고 있어 부산의 다른 문중에서 답사하 여 재 실 건 축 의 모 범 을 삼 는 경 우 가 많 다. 죽산박씨부산문중을찾아 죽산박씨(竹山朴氏)는경명왕(景明王)의아들(王子)인죽성대군(竹城大君)언립(彦立) 으로부터문호(門戶)가열리게되었다.죽성대군언립(彦立)의아들기오(奇悟)가왕건 (王建)을 도와 고려창업(高麗創業)에 공(功)을 세우고 태조(太祖)때 삼한벽상공신(三 韓壁上功臣)으로삼중대광태보(三重大匡太保)에 올라죽주백(竹州伯)에봉해지고 식 읍(食邑)으로 죽산(竹山)을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 었다. 죽주백(竹州伯)의6세영후(永侯)의장남정유와차남정혁에이르러각각충질공파휘 정유(忠質公派 諱 挺 찮)와 소경공파 휘 정혁(少卿公派 諱 挺奕)로 분파되었다.소경공 의현손에이르러다시판서공파(휘暉)와찬성공파(휘暄)로판서공파에서는문광공파 태복경공파로문광공파에서는문강공파별장공파제학공파,충현공파로,태복경공파 에서는 목사공파, 총제공파, 문강공파에서는 직제학공파, 연흥군파 좌랑공파 전서공 파대사헌공파로분파되었다.연흥군파에서문헌공파,문정공파가분파되었다. 부산에거주하는후손들은총제공휘덕공(德公)의후예들로이번청년회에서찾아간 곳은 총제공 후(后)인묵재공의 재사(齋舍)주산재와 인묵재공의 손재 의재공의 재실 영추재이다. 뱚▶주산재(珠山齋) 인묵재공의 비(碑)와 주산재-현대식 건물로 학 생들의전통예절교육장소로도활용되고있다. 주산재 경내에 세워진 부산세무고등학교-인묵 재 선생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성실과 협동으 로 조국의 번영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창의적인 한국인의양성을건학이념으로 삼고있다. 뱚▶영추재(永追齋) 영추재-후손들이 언제든찾아쉴 수있도록잘보존되어있음에청년들은놀라지않을수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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