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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이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끌려갔다 "내 나이 12살. 언니와 나물을 듣는데 차가 오더니 모자 쓴 사람들이 차를 타라고 했다. 둘이 끌어안고 버렸더니 나를 발로 차버리고 언니 머리채를 쥐고 차에 태웠다. 내가 울어대니 나까지 주위 올려 한꺼번에 잡혀갔다. 대만에서 다른 차에 실린 언니와 헤어져 생사도 모른다" - 심달연 ”징용으로 끌려간 남편이 남양군도에서 죽었다고 소식이 왔다. 남편 죽은 보상금을 직접 가서 받아야 한단다. 어린것들을 친정에 맡기고 따라나섰더니 목단강 근처 군부대였다. 복단강! 어린것들 던져두고 끌려온 목단강을 어찌 잊겠는가" - 정윤희 "처녀를 잡아간다기에 또래들과 20여일을 화장막에 숨어있었다. 동생이 '배고파 죽겠다. 누나가 '신민서사‘ 외우니까 배급 좀 타주라.’ 애원해 배급 타다 들켰다. 순사 한 명과 헌병 두 명이 항의하는 아버지를 총대로 내리쳐 이마에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열네살의 나는 끌려갔다. 군인들과 함께 군함에 실려 남태평양 팔라우로.“ - 강순에 "고등과 1학년 16살 때 담임선생의 권유로 근로정신대 1기생으로 후지코시 비행기공장에서 일했다. 배고프고 힘들어 도망치다 헌병에게 잡혀 강간당하고 부대로 넘겨졌다. 일본은 패전했지만 이미 임신이 됐고 귀국길은 막막했다. 귀향민 숙소에서 애기를 낳고 몇 달 후 고향으로 가니 어머니는 애 딸린 그 꼴로는 집에 못 들어온다고 부산으로 보냈다. 아이는 고아원에 맡기고 식당에서 일하며 일요일마다 만나러 갔다. 어느 날 내 아이의 옷을 다른 아이가 입고 있었다. 아이는 며칠 전 폐렴으로 죽었단다. 아이의 주검도 보지 못했는데...” - 강덕경 - 너무 험한 악몽이다 "도망가자마자 붙들려 끌려들어 왔어. 순사가 때리다가 군인 시켜 또 때리지... 군화로 짓밟고 칼차고 권총 차는 큰 허리띠로 때렸어. 온몸이 시퍼렇게 굴뱅이진 몸으로 다음날부터 또 군인을 받았어. 그 놈들도 놀라서 달아나더라구." - 이옥선 "몸이 혹사당해 약할대로 약해진 여자들은 '나카이‘들이 끌어내고 건강한 다른 여자로 바꿔치웠다. 끌어낸 여자들은 골방에 가두고 밥도 제대로 안 줬다. 주사를 놔도 소용이 없으면 군인들이 트럭에 싣고 산으로 끌고 갔다. 죽은 여자는 산에 갖다버리고 풀잎으로 겨우 가려줬다.“ - 이귀분 "한 집에 한명씩 일본 군수공장으로 가야한다니 남의집살이 하는 내가 차출됐다. 함흥역에서 일본군인에게 넘겨져 20여명이 군용열차로 길림역 도착. 너덜거리는 트럭을 타고 군부대 속의 한 막사로 갔다. 장교방으로 끌려간 후 살려달라고 뿌리치는 나를 후려치고 옷을 찢었다. 얼마 후 찢기고 뜯긴 옷을 대충 두르고 눈물범벅인 채 끌려나오는 내게, 먼저 온 언니가 말했다. ’거봐라. 우리는 살아서는 못나간다.’” - 황금주 “총 끝으로 엉덩이를 세대나 얻어맞고 고꾸라졌다. 푹 패인 엉덩이 상처는 곪아서 똑바로 눕지도 못하고 열은 났다. 그래도 군인들을 받아야했다. 그러니 살은 계속 썩어 들어갔다. 수술 후 3일 만에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군인들이 달려들었다. 누구나 도망가고 싶었지만 우리 꼴을 보고 모두 포기했다.” - 윤두리 - 해방 후 귀국 귀향 "7년째 끌려 다니니 해방이란다. 기쁨보다 참담했다. 조국은 해방인데 몸은 망가지고 가진 것 없이 무슨 희망으로 돌아갈까. 새로운 불안과 굶주림에 떨며 해를 넘겼다. 이듬해 3월, 고향에 가니 어머니는 세상을 떴고 아버지는 정신이상으로 떠돌이가 되셨단다.” - 박유년 "고향인 평양에서 남경으로 끌려가 이리저리 부대를 따라 다녔다. 해방소식 듣고 배타고 부산으로 들어오니 모두들 고향 찾아 간다는데 이북이 고향인 나만 홀로 남았다. 고향 가는 방법을 물었더니 술집에 나 몰래 선물 받고 팔아버렸다.“ - 김은례 "일본이 패했으니 도망가자 했으나 모두 고름이 나고 부어 있어 걷지 못해 혼자 떠나라 했다. 동료들과 눈물로 헤어져 그 넓은 병영의 문을 세개나 거쳐 벗어났다. 거리에서 얻어먹고 웅크리고 자며 걷고 또 걸어 청량리에 도착하니 12월 초였다.” - 황금주 - 반세기의 침묵을 깨다 "처녀 공출을 피해 대학을 자퇴하고 강원도로 갔다. 해방 후 복학해 군수공장 정신대 차출이 위안부라는 것을 알았다. 인간에 대한 분노와 누군가 이 사실을 밝힐 거라는 기다림이 있었다. 그러나 피해자들만 그 참혹하고 억울한 한을 숨죽이며 혼자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단지 식민지 조선 여성이기 때문에 멍에를 진 것이다. 1973년 샌다가꼬의 '종군위안부'가 출간되면서 나는 조금씩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1980년에는 배봉기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오끼나와 방문을 시작으로 피해자 목소리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10년 만에 친구 이효재 교수의 도움으로 1990년 11월 16일. 37개 단체들이 참여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출범한다. 일본은 증거를 대라고 우릴 무시했다. 공개증언자를 꼭 찾아야 했다.” - 윤정옥(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초대 회장) "다시 그 기억을 되새김질 하는 것은 무척 힘들지만 언젠가는 밝혀져야 할 역사적 사실이기에 첫 증언을 하게 되었다. 차라리 속이 후련하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나를 살려준 것은 이 문제를 위해 싸우라는 뜻이라 생각한다.” - 김학순 첫 증언자 - 수요시위 소녀상·나비기금·인권·평화운동 "나는 여기 저와 함께 있는 이 여성들 때문에 어떻게 과거의 아픔을 이기고, 여러분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증언을 경청해 주는 여러분들의 응원도 저를 당당하게 만들어 줍니다." - 이용수 "우리가 다 죽고 난 후에도 소녀상은 이 자리에 남아 우리를 잊지 않게 할 것이고, 우리를 대신해 일본정부에게도 해결하라고 계속 요구할 것입니다.” - 안점순 "지금도 세계 각국의 전쟁 속에서 고통당하는 여성들을 위해 앞으로 김현욱과 제가 받게 될 배상금을 기부하고 분쟁지역 피해 아동들을 지원하고 평화활동가를 양성하기 위한 장학금으로 거의 전 재산 5천만원을 나비기금에 기부합니다.” - 김복동 "우리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매주 수요일마다 거리에 서고 먼 나라까지 우리 문제를 알리러 갑니다. 내가 일본 정부에게 요구한 것은 배가 고파 밥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을 공개하고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며 우리에게 공식 사죄하고 법적 배상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전쟁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 길원옥 "전쟁과 폭력의 역사를 닫고 평화와 정의의 물결을 트고자 합니다. 전쟁 속에서 성폭력 당하고 고통 받는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우리는 연대의 손을 뻗치고자 합니다.” -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