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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고를 치르는 동안 갖은 고문으로 선생은 반신불수가 되어 출옥하였으나 오갈 곳이 없 어, 선생은 독립운동 은둔지었던 오막살이 집(전남 장성군 삼서면 두월리 947번지)의 산간벽지에 거 처를 정하 였으나 일제의 갖은 간섭과 탄압 그리고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셨다. 1937년 선생의 나이 38세 되든 해 봉남중과 이두남의 2남3녀 중 둘째딸인 봉분례 여사 와 결혼하 여 슬하에 3남 4녀를 두셨다. 선생의 손으로는 박금안 ,박춘회, 박중회, 박순회,박순자,박순근,박양길 3남 4녀이다. 효행이 깊은 선생께서는 일찍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너무도 그리워하시다가 부모님 묘역 만은 꼭 좋 은 자리로 모시겠다는 마음으로 풍수지리학자와 함께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전국 방방곡 곡을 10여 년이 넘도록 다녔으며, 이에 감동한 풍수지학자가 전북 부안 상서면에 산태극 수태극의 명당자리 를 내어주었다. 후손들은 선생의 효행을 받들어 매년 4월 말째주 토요일 시제를 모시고 있다. 선생은 호남 율계회장을 역임하셨고 인생의 황금기를 구국에 몸바치셨다. 선생은 일생을 애국애족하는 마음으로 사시다가 조국의 평화통일을 보시지 못하고 끝내 서기 1975년 10월 19일 만 76세에 애석하게도 타계하였다. 선생의 묘역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에 안장되셨다. 선생의 배우자 봉분례(1918.09.01~1997.3.11) 여사께서도 1997년 서거하여 합장하였 다. 선생께서는 안타깝게도 생전에 독립유공자 지정을 보시지 못하고 1977년 12월 12일 국 가로부터 “대통령 표창”이 추서 되었으며 서기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훈격되어 추 서되셨다.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 308번에 안장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