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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이야기하다 들불 7열사의 삶과 죽음 박기순 1958~1978. 12 전남대 학내 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당한 뒤 78년 여대생 최초로 공장에 위장취업했다. 그리고 들불야학의 창립을 주도했다. 야학 일로 며칠 밤 샘을 한 78년 12월 26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을 거두었다. 82년 6월 윤상원 열사와의 영혼결혼을 기리는 창작노래극에서, 김종률이 작곡하 고 황석영이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를 노랫말로 고친 ‘님을 위한 행 진곡’이 처음 불려졌다. 윤상원 1950~1980. 5 대학을 졸업한 뒤 다니던 서울 직장을 던지고 광주로 와서 공장노동자 로 일하며 들불야학 강학으로 활동했다. 사람들은 그를 일러 ‘5월을 위 해 태어난 인물’이라 한다. 그만큼 항쟁 전 과정에서 그의 역할이 컸다. 수습위원회의 ‘총기반납’ 주장에 대해 항쟁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마지 막 항쟁지도부의 대변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도청에서 생을 마감한다. 박용준 1956~1980. 5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에게 버려졌고 성장과정도 가출과 고학의 연속이 었다. 73년 광주 YWCA신협에 수금사원으로 취직하면서 김영철과 형 제의 연을 맺었다. 그 인연은 다시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그리고 들불야 학으로 이어졌다. 워낙 필체가 좋고 속도가 빨라 항쟁기간 투사회보 제 작에서 전문 필경사 역할을 했다. 항쟁 마지막날 새벽, YWCA를 지키 다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