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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경채 선생은 1910년 전남 광산군 송정읍 송정리 612번지에서 아버지 이성륜과 어머니 주북산 슬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10살 때 송정소학교(송정동초등학교)에 입학 4학년이 되던 해 독학하여 6학년으로 월반 졸업함(제4회 졸업) 1924년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서중.일고)에 입학 1926년 광주고보 3학년 시절 독서회 조직. 1928년 광주고보 5학년 때 동료 박병하, 윤해병 등과 독립선언문 격문 작성 광주시내 요소와 서울신간회(조선인단체)등에 우송함. 1928년 6월 이경채 학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광주고보 전교생이 석방하라고 동맹휴교에 들어감. 47명의 학생이 퇴학당하자 광주학생들이 일제에 대한 반항의식이 크게 고무됨. 이 사건으로 선생은 광주지방법원에서 1년 6월의 형을 받고 개성소년형무소에서 복역 중 감형되 1년간의 옥고를 치름.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다시 배후세력으로 지목 1개월간 옥고 치름. 1931년 일본 유학 결심 검정고시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법률과 야간부에 입학. 신문배달과 공사현장인부로 전전 재일본 유학생들을 규합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시청에 적발 6개월간 구금 받음. 1933년 동경에서 동료 학생이 체포되자 고베 항에서 일본 우선 소속 배에 올라 3일간 짐짝 밑에 숨어 밀항에 성공. 1933년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들 피신 연락이 두절됨. 상해의 불란서 조계지에서 인성소학교 선우혁 교장을 만남. 김판수로 개명 교사로 봉직함. 1934년 상해임시정부 김철 선배를 만나 이중환이라 다시 개명. 항주에서 한국독립보에 종사함. 1935년 한국독립보 발간이 중단되자 상해로 돌아와 이일휘란 이름으로 장개석의 비밀조직인 장백리의 일본연구소에 참여함. "일휘"란 이름은 연구소장 장백리씨가 "항일운동에서 크게 빛내라"는 뜻에서 지어줌. 장백리씨는 독일,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사전문가로 장개석 주석의 군사고문이었음. 1936년 연구소는 해산되고 연구소 전원이 장개석 국민당 군대에 채용됨. 선생은 중국 육군 군관학교 13기생으로 입교함. 1937년 7월 노구교사건과 8.13 상해작전이 발발하자 군관학교 학생들 전원 중위로 입관됨. 선생은 제15집단군 육군 11사단에 배속. 상해 가정현 외강에서 상해 크리크 작전에 참전함. 상해 크리크 전쟁이 끝난 후 제15집단 사령부로 복귀함. 1945년 중일전쟁은 끝나고 국민당 중앙군 중교(중령)로 진급. 능력자로 인정받은 선생은 전역이 허락되지 않아 1948년 말에야 현역 군인 신분으로 1년간 휴가 귀국 19년 만에 가족들과 상봉. 고향에서 지내시다가 1978년 불의의 사고로 타계.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됨. 이경채 선생께서는 1938년 추수이 여사와 결혼 3남 2녀를 두셨다. 2017년 5월 일 글 류복현(전 광산문화원장) 감수 이용정, 오순근, 조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