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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채 선생은 1925년 광주고보(光州高普) 3학년 재학시부터 독서회(讀書會)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1928년 동교 5학년 재학 중에는 "조선독립선언문" 등 격문을 유인하여 살포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에 그가 학교당국으로부터 퇴학처분을 받게 되자 광주고보 학생의 5개월간에 걸친 동맹휴학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는 동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출판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1년에 도일(渡日) 조도전(早稻田)대학에 입학 후 학생운동을 계속하다가 1933년에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김판수로 변명(變名)하고 인성(仁成)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34년에는 임시정부 기관지 한국독립보(韓國獨立報)의 발간에 참여하였다. 1936년 9월 중국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중국육군 제11사에 배속된 후 항일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는 그후 1949년까지 중국군에 복무하였으며, 국민정부 중앙군에서 중교(中校:中領)로 제대하고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