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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5월31일 수요일 7 (제125호) 기획 927년 9월, 견훤의 반격이 개시되었다.왕건은 세 루트를 통 해 견훤의 동정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첫째, 완산주(전 주)를 비롯한 백제 강역에 심어 놓은 첩자들의 보고망, 둘째, 경북 내륙에 둔영을 구축한 고려군의 치보,셋째,왕도의 인후 (咽喉)라 할 고울부 능문의 보고 등 세 갈래였다. 한데 927년 경애왕이 견훤의 군사적 공격의 표적이 되었던 그 때, 왕건은 경애왕을위해무엇을했는지를도무지포착할수없다. 다-1)九月甄萱攻燒近品城進襲新羅高鬱府逼至郊畿①新羅 王遣連式告急②王謂侍中公萱大相孫幸正朝聯珠等曰,③“新羅 與我同好已久今有急不可不救.”④遣公萱等以兵一萬赴之⑤未 至⑥萱猝入新羅都城. 븮高麗史븯권1世家1太祖110년(927)9월조 위 의 기 록 은 신 라 경 애 왕 이 왕 건 에 게 구 원 요 청 을 하 자 왕 건이 “신라와 우리는 동맹을 맺은 지 오래되었으니 구하지 않 을 수 없다”라며 구원군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 위 기록은 글자 그대로만 무비판적으로 해석되어 왔 고, 그 결과 왕건이 경애왕을 도왔으며 구원군을 파병한 것으 로 이해했다. 한데 위 기록이야말로 왕건의 방관을 드러낸 결 정적증거가아닐수없다. 1 )왕 건 이 견 훤 의 침 습 을 전 혀 몰 랐 다 는 대 목 , 2 )신 라 의 구 원 요청을 받고서야 알았다는 대목, 3)견훤의 모든 동정을 파 악했던 왕건이 선제 대응은커녕 경애왕의 요청이 있기까지 방관한 대목, 4) 경애왕의 구원 요청이 있은 후에조차 왕건이 즉각 친정하지 않은 대목, 5) 뚜렷한 군공이나 무용조차 알려 지지 않은 공훤을 주장(主將)으로 삼아 출정하게 한 대목, 6) 공훤이 거느리고 출병했다던 ‘경병(頸兵)1(만)萬’의 구원군’ 마저 경애왕 죽음의 순간까지 서라벌에 이르지 않았던 대목 등은하나같이왕건의방관을보이는결정적증거인셈이다. 요컨대 경애왕 죽음의 일인(一因)에는 왕건의 방관,심지어 는 방조가 엿보인다. 왕건은 경애왕의 위기를 적극적으로 구 하지 않았음은 물론 교묘한 방법으로 방관, 조장한 주범이었 다. 궁예와 견훤은 반신라 정책에서 공통된 기조를 유지했다. 9 18년 왕건이 쿠데타로 집권하자,920년 신라와 고려는 수호하 였다. 이른바 신라ㆍ고려의 동맹,합종이 이뤄진 셈이었다. 그 러한신라ㆍ고려동맹의일환으로서고려가신라왕도를구한 것,혹은구하려시도한것은세차례였음이확인된다. 이른바 ①920년 10월 븮三國史記븯 권12 신라본기12 경명왕 4년조, ②927년 9월 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권12경애왕4년9월조,븮三國遺事븯권2 기이2 김부대왕조. ③933년 5월 븮高麗史븯권92 열전5 庾黔弼의 경 우 였다.①은 경명왕이 왕건과 수호(修好)한 지 9개월 뒤의 일이 며, ②는 경애왕이 왕건과 축산을 합동 공격한 지 8개월 뒤의 일이며븮高麗史븯권1 世家1 太祖 10년(927) 1월조. 븮高麗史븯권 57 지11 地 理2 ,③은 김부가 왕건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선린(善隣)을 다 짐 한 지 2 7 개 월 뒤 의 일 이 다 . ①의 경우는 고려 주장이 박수경,②의 고려 주장은 공훤(公 萱),③의 고려 주장은 유금필이었다.한데 ①,③은 신라 왕도 (王都)방어에 성공했으나,유독 ②의 경우만 실패했다.또 그 결과는 포석정에서 신라 군신(群臣)이 피살, 함몰되고, 심지 어 경애왕마저 모종의 세력에 의해 시살(弑殺)되기에 이르렀 다. ①의 경우 ‘보기(步騎) 1만’을 거느린 견훤이 박수경의 이 름만 듣고도 퇴각했으며, ③에서는 후백제 신검의 군대에 맞 선 유금필이 장사 80인 만으로 적선을 돌파,왕도를 구하였다. 반면 ②의 경우 동원된 고려 군사의 규모가 물경 ‘경병(頸兵) 1(만)萬’이었음에도 왜 이처럼 뜻밖의 결과로 나타났던가 의 문이제기된다. 가장 출병 규모가 컸음에도, 유독 공훤이 통솔한 ‘경병 1만’ 만이 실패했다. 936년 신검과의 최후 회전(會戰)에서 공훤은 3군의 원병, 보급 역할을 맡았을 뿐 실제 전투에조차 투입되 지 않았다.당시 고려군 편제에서 확인되는 37명의 장수(견훤 제외) 중 공훤은 35번째로 거명되고 있다. 또 휘하의 기병 역 시 불과 300이었을 뿐이다. 주장 공훤의 여러 전력을 살펴볼 때, 그는 위기를 타파하고 적선(敵線)을 허물며 돌격할 성정 (性情)의 인물이 아니었다. 결국 왕건은 선택할 여러 경우의 수,최적의인물들가운데가장묘연한인물(공훤)을택했다. 송악-서라벌까지의 소요 시간이, 최장 9일-13일까지임을 고려할 때 출발한 고려 구원군이 서라벌에 도착하지 않았다 는 것은 심각한 의혹이다. 심지어 927년 경애왕 사후, 한겨울 에 있은 왕건과 견훤의 대회전(大會戰), 팔공산 동수전투에 서조차 1만 군사의 흔적은 간취되지 않는다. ‘경병(勁兵)’, 그것 도‘1만’에달하는‘대군(大軍)의실종’에대해서는지금까지아무도주목 하지않았으며, 출병자체에의문을표시한 선례도없었다. 936년일리천 전투의 고려군 편제를 보면, 경기를 거느린 이는 유금필뿐이며, 대개 마 군, 기병으로만 편제되어있다. 까닭에‘경병’이라는말 자체가허구가아 닌가 여겨진다. 중간 경유지조차 확인되지 않기에, 기록대로라면 1만 대 군의행방은전설처럼행간에서실종되었다고해야옳을것이다(Theans wertowayofthatarmyisblowingin theworld). 위의 기록 다-1)에선 븮삼국사기븯, 븮삼국유사븯에선 보지 못한 내용들이 확인된다. 곧 경애왕이 왕건에게 보낸 사신의 이름 이 ‘연식(連式)’이었다는 것(다-1)①), ‘신라와 고려의 동호 (同好)가 오래된 지라 지금 급함이 있다 하니 가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왕건의 발언(다-1)③)이 새로 보태어져 있 다. 그리고 왕건이 실제 공훤(公萱) 등을 보내 출병한 것처럼 되어 있다(다-1)④). 한데 ‘미지(未至)’란 구절(다-1)의 ⑤) 이직후나타난다. 위 다-1) ④대로 출병이 있었다면, 가-1) 뛞의 공산 회전에 서 견훤과 조우, 그 예봉을 막을 군대는 왕건이 아니라, 앞서 파병한1만군대라야한다.아니면최소한견훤과의공산전투 에서 1만의 고려 구원군과 왕건의 친솔군(親率軍)이 모두 간 취되어야 마땅하다.한데 다)-1의 ⑤의 기록대로라면 고려 구 원군은실상증발되었다고표현해야옳을정도이다.고려에서 1만군은 과연 증발해도 좋을 정도의 작은 비중에 해당하는 것 일까. 후삼국의 동란을 통틀어 패자와 향방을 가르는 건곤일척의 승부 중 가장 큰 규모는 936년 9월 갑오(甲午),왕건과 신검의 일리천 회전이다.당시 왕건이 거국적으로 총동원한 군사는 8 7,500명이었다. 븮高麗史븯권2世家2太祖119년(936) 9월조. 당시9월甲 午일이라고 나오나 甲午는 없다. 한편 븮東史綱目븯 6상 936년조에는 갑오 (8일)로 나타나지만,실제로 8일은癸亥에해당한다. 그 중 북방 유목민의 군사 9,500명을 빼면 당시 왕건의 실제 병력은 78,000명이었다. 여기에는 동해 지방 왕순식의 병사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왕건의 실제 병력은 더 작아진다.903년~9 27년까지 왕건의 동원 병력은 1만을 넘어선 전례가 없다. 927 년왕건의공산회전에서도병력은5천에불과했다.왕건에비 해 군사가 갑절이나 많았다는 견훤이 븮三國遺事븯권2기이2후백제 견훤 934년 운주 전투 당시 5천의 군사였고 븮高麗史븯권92 열전5 庾黔弼, 920년 대야성 전투 당시 견훤의 군사가 보기 1만이었 다. 븮三國史記븯권12신라본기12경명왕4년조 왕건의 친정도 아닌 상 태에서 1만의 거병, 파병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고려 총 군사의 2할에 달하는 1만의 동원치곤 군사 편제, 출병 일 자, 동선 등이 불확실하다. 기록에선 1만 대군의 출병일자, 동 선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븮三國史記븯권50 열전10 견훤, 븮高麗史븯권1 세가1태조10년조(박순교,〈신라景哀王의‘포석정遊幸과 죽음’에관한 是非검토-일연의븮三國遺事븯를중심으로-〉,븮인문연구븯78,2016.<표1> 가-1)⑤에서 10월에 출병했다던 군대는 그 이후의 전체 행 적마저 묘연하다 븮高麗史븯 권2世家2 太祖1 19년(936) 6월조에는 將軍 述希에게步騎1만을천안에보낸기록,즉도착 지점이 명시되어있다.이 는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927년 고려 구원군 1만의 파병과는 크게 대비 되는 대목이다. 특히 ‘명장출경병일만왕구(命將出勁兵一萬往 救)’(나-1)③,나-3)③)의 글자는 ‘장수에게 명하여 勁兵 1만 을 내어 가서 구하게 했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곧이어 ‘구병 미지(救兵未至)’(나-1) ④,나-3)④), ‘구원병이 도착하지 않 았다’라고적고있다. 송악-서라벌의 도착 시간(최장 9일-13일)을 감안할 때, 출 병 사실(다-1)④)과 도착하지 않은 사실(다-1)⑤) 자체는 명 백한 딜레마(모순 구조)를 이룬다. 혹여 후백제군과 사력을 다한 치열한 교전이 있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올 수 있다.그렇 다면 ‘구병미지(救兵未至)’(나-1) ④,나-3)④)에 대한 구원 군의 중간 경로, 구원군이 막힌 원인, 구원군과 백제와 대소 (大小)의 전투 등의 기록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들은 견훤의 군사와 싸웠다는 기록이 전혀 없고, 더 이상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행방조차 묘연하다. 일견 견훤군과 싸워 궤멸된 것이라 추측할 수 있겠으나, 공훤을 포함한 고려군 지휘부의 이후 생존이 명확히 확인된다. 고려군 지휘부로 상정할 그룹은 공 훤, 연주, 손행등인데, 손행을제외한 나머지는이후생존이 확인된다. 연 주는936년後百濟와의마지막 결전이었던 一利川싸움에元甫서 大相 金鐵, 洪儒,朴守卿, 그리고 元尹 萱良과 함께 馬軍 1만 명을 거느리고 3 軍 중右軍에소속되어참전하였다.(븮高麗史븯권2世家2太祖119년(936)9 월조.)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태조장출사원조(太祖將出師援 助)’(가-1) ⑤, 가-2)④)는 ‘왕건이 장차 군사를 내어 원조하 려 했다’라고만 되어 있다.이 말대로라면 왕건은 출병하지 않 았음을 내비친다. 일연은 븮삼국사기븯(가-1) ⑤)의 ‘출병 시점 10월’이란 기사를,븮삼국유사븯(가-2)④)에서 아예 생략하였는 데,이 역시 출병의 사실성에 의문을 지닌 일단이 아닌가 여겨 진다. 왕건의발언, 다-1)의 ③ 역시, 파병에 대한 고려내이견이 적잖이 있었고그에따른왕건의발언이 아닌가여겨진다.이론의여지가없는파 병이었다면굳이 왕건이 이와같은蛇足을붙일필요는없기때문이다. 무엇보다 927년 경애왕의 죽음을 이해할 관건이자 동시대 자료인 견훤의 서한 븮三國史記븯 권50열전10견훤및븮三國遺事븯권2기 이2후백제견훤조에공히인용된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한’, 왕 건 의 서한 븮三國史記븯권50열전10견훤및븮三國遺事븯권2기이2후백제견훤조 에공히인용된‘왕건이 견훤에게보낸서한’ 에서도 1만 고려군의 존 재는 전무하다. 견훤이 여타의 소소한 전투까지 상세히 열거 하며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면서도 가장 규모가 큰 ‘1만 고려 군’과의 공방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출병 자체가 실제 없 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왕건은 자신의 서한에서 평소 존 주(尊主)와 견마지로의 태도를 표방한 것 ‘以申犬馬之勤.再擧干 戈’(븮三國史記븯 권50열전10견훤및븮三國遺事븯권2기이2후백제견훤조에 공히 인용된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서한’)을 역설하고 있는데, 경애 왕 의 죽 음 에 관 한 전 후 관 계 를 통 하 여 볼 때 왕 건 자 신 이 견 마 지로를 다했음을 드러낼 가장 중요한 전거는 1만 구원군의 파 병 사실이다.한데 왕건 역시 자신의 편지 속에서 고려의 구원 군 1만에 관하여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 곧 당시 견훤과 왕건 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면서 주고받은 편지, 말하자면 동시대 기록이라 해야 할 자료 속에서,견훤과 왕건이 공히 고려 구원 군에 대한 언급을 일점일획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파병의 진위에대한정확한답을왕건이제시한것이다. 한편 ‘1만’의 병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군수, 편제 등 거병에 적잖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그간 왕건이 친솔한 군대 조차 5천 내외의 규모인 것을 고려한다면 1만 군사의 동원,그 자체는 초유의 일이었다.1만의 군사를 보급과 편제를 갖추고 소모(召募),징집(徵集)하는과정자체에는적잖은시일이걸 린다.936년일리천전투를위한 전쟁준비에는대략 3달이 걸린것이 확 인되고 있다. 正胤(태자) 武와 將軍 述希에게 步騎 10,000을 천안에 보낸 것이 936년6월, 왕건이 천안에서랑데부를가진것이 936년9월임이 확 인된다.(븮高麗史븯권2世家2太祖119년(936) 6월조와9월조.) 까닭에 1만 이란 숫자의 동원 자체는 일견 적극적 구원의 의미를 뜻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시일을 끌어 출병을 늦추고 사태의 변화를 방관 혹은 회피하려는 이중적 의미를 함의한 위장일 수도 있 다. 왕건이 예전 말과 행동에 있어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였던 점도 참 고할 일이다. 925년 曹物郡에서 벌어진 왕건과 견훤의 會戰에서 왕건이 견훤의화의요청을받아들여상호인질을교환하려하자, 경애왕이 견훤 의성정을직설적화법으로 묘사하며양자의 화의를 반대했다. 그러자 왕 건은 경애왕의 뜻을 존중하였다고(‘太祖然之’) 했다. 한데 행동으로 옮겨 진왕건의선택은경애왕의뜻을무시한, 견훤과의화의성사였다(븮三國史 記븯권12신라본기12경애왕2년조,븮高麗史븯권1세가1태조8년). 이에서왕건이말한1만의군대란명목상의군대,실체가없 는 ‘유령 군대’로서,의외의 의도,곧 출병 시일을 끌고 여론을 호도하려는 음험한 묘책, 기만전술의 일단이 아닌가 보인다 고려 구원군을 둘러싼 일말의 의혹은 고려군의 전력과 관계될 수 있다. 견훤과 交戰한들,승전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전쟁을원치않지만 전 쟁을못한다는것을알리기힘들어나온 일종의고육책일수있다.들어줄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서 파병의 거짓 움직임, 이중적 행 태를보인단서가바로 구원군의숫자‘1만’이 아닌가한다. 고려 구원군의 의문은 주장(主將)공훤에서 더욱 확산된다. 먼저 신라를 구원할 의도가 있었다면 왕건이 즉시 친정했어 야만 한다. 당시 후삼국의 군세는 1강(견훤) 1중(왕건) 1약 (경애왕)의 형세였고, 강한 견훤에 대항해 나머지 둘의 합종 이 진행된 상태였다.왕건의 즉위 직후 이흔암을 필두로 한 마 군(馬軍)장군들의 반란이 접종했고, 충청도 일대 세력은 뚜 렷한 교전조차 없이 썰물처럼 왕건을 떠나 견훤에게 투항했 다. 견훤의 군세가 욱일승천의 기세였던 반면 왕건은 이와 대 비될 만큼 약화일로였다. 견훤에 비해 열세에 처한 왕건과 경 애왕의연대는절실했다.927년 정월 용주 공격 성공에서 보이 듯양자의합종은일견성공적인결과를낳기도하였다. 한데 왕건은 927년 9월 견훤이 예봉을 남으로 돌려 신라를 겨냥하는 시그널, 이른바 합종의 맥락이 붕괴되려 한 조짐이 명백해진 순간에도 복지부동, 신라의 구원 요청이 있기까지 전모를 모른 듯 능청을 떨고 있다. 앞서 왕건은 표1의 ⑭에서 소극적 수성(守城)을 고집한 적이 있었는데, 왕건이 즉각 친 정하지 않은 것 역시 왕건의 의지 결여,왕건의 방관이 분명하 다. 왕건의 친정은 경애왕이 죽고 나서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절차와 명 분을갖추며전략적으로 이뤄졌다. 경애왕생시에는그처럼방관적입장 이었던왕건은무엇을노리고경애왕사후행동에나선것일까. 먼저왕건 은경애왕죽음을듣고弔使를파견했다. 이것은사신의행렬이 지역일대 를거쳐이루어지는것인만큼, 견훤의악행을확대, 포장, 선전하기 위함 일것이었고, 그러한 행동을통해민심을견훤에게서돌리려는일단일것 임은자명하다. 견훤은경애왕을죽인이후서라벌왕궁에서만 15일을기 거했다(박순교,앞의논문,2015,p,46).이 말은왕건이 경애왕죽음이 있 고서도최소한 15일간親征에오르지않았음을의미한다.견훤에의해김 부가 옹립된 이후, 왕건은 일련의 흐름, 민심의 동향이 자신에게 유리하 다고여겨질즈음군사작전을행했을해석이 일단 가능하다. 위의다-1)④를 보면 왕건이 임명한 원군의주장은시중공 훤이었다. 기록상 공훤은 그 이전 무쌍(無雙)의 용맹한 공적 이 없다.이름이 알려진 용장도 아니며,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벌인이력도없다.1만의정예군사를통솔하려면과거수천의 군사를 자유자재로 부린 이력이 있어야 가능한데, 고려 왕조 에서 초유의 1만 군사를 동원하면서 무명의 공훤을 임명한 대 목은 이상하기 짝이 없다. 공훤은 왕건의 개국 공신 1등 4명 (홍유,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개국공신 2등 7명(견권, 능 식, 권신, 렴상, 김락, 연주, 마난)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기 록상 1만 대군을 서슴없이 맡길 만큼, 왕건의 최측근 심복이 라고도말할수없다. 공훤의 본관은 신청(信川) 강씨(康氏), 성명은 강공훤이었 다. 공훤의 성명은 ‘지기주제군사(知基州諸軍事) 상국(上國) 강공훤(康公萱)’에서 확인 가능하다. ‘재가제자(在家弟子) 좌승(佐丞) 공훤(公萱)’이라는 구절에서 신심(信心) 깊은 재 가(在家)의불제자였다.이는 동시에생사가엇갈리는 살벌한 전 장 의 장 수 와 는 거 리 감 이 있 는 존 재 임 을 알 수 있 다 . 강 공 훤 은고려사에4번나타나는데,B①927년(다-1),B②930년(다- 2) B③935년(다-3), B④936년 븮高麗史븯권2世家2太祖 19년(936) 9 월조 이 그것이다. 강공훤은 B①에서 1만 원병의 주장으로 나타 나지만, 그 이전 무공은 없다. 강공훤은 어떤 용력, 성정을 지 닌 인물일까. 아래 기록을 통해서 그의 성정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 다 . 다-2)十二年甄萱圍古昌郡黔弼從太祖往救之行至禮安鎭太 祖與諸將議曰A戰若不利將如何?”大相公萱洪儒曰 B若不利 不可從竹嶺還宜預修閒道.” 黔弼曰C臣聞‘兵凶器戰危事有死 之心無生之計然後可以決勝.’ 今臨敵不戰先慮折北何也? 若不 及救以古昌三千餘衆拱手與敵豈不痛哉? 臣願進軍急擊.”D太 祖從之E黔弼乃自猪首峯奮擊大破之.太祖入其郡謂黔弼曰“今 日之捷卿之力也.” 븮高麗史븯권92열전5庾黔弼4 위의 다-2)는 927년 포석정 사건에서 3년이 지난, 930년 정 월의 상황을 담고 있다. 당시 고창(안동)에는 견훤에게 포위 당한고려군3천(千)이생사의기로에처했고,구원에나선왕 건은고창북방 30리지점인예안(禮安)에서 군략(軍略)을논 하던상황이었다.다-2)의 A에서왕건은싸우기도이전,전황 의 불리를 걱정하고 있었다. 왕건의 수세적 태도는 이미 여러 기록에서도 간취되는 바, 왕건의 소극적 태도가 이에서 재확 인된 셈이다 다-2)의 A와 B를 고려할 때, ‘견훤의 악이 차 스스로 자멸 하기만 기다리겠다.’고 토로(뛝 )했던 왕건의 天性은 그대로였다. 경애왕 의요청에도즉각적도움을외면한 것으로 의심되는왕건은, 이제눈앞에 자국 군사 3천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퇴각(줄행랑?)을 고려하 고있었다고여겨진다. 다-2)B에서 공훤(公萱)은 탈출, 도주를 위한 샛길을 닦자 는 주장을 펴고 있다.진보의 선필이 동쪽 배후를 받치는 상황 에서도 四年, 春正月, 載巖城將軍善弼降高麗, 太祖厚禮待之, 稱爲尙父. 初, 太祖將通好新羅, 善弼引導之, 至是降也, 念其有功且老, 故寵褒之.(븮三 國史記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4년조(930년) 공훤,홍유는 진공이 아 니라 퇴각의 문제를 염려했다.공훤은 왕건에 맞춰 우회,도피, 퇴로 등을 거론할 만큼 소극적 성정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소 극적태도의기저에는적을제압할무용의부족과같은사정도 작용하고있다고믿어진다.또한왕건의소극성을누구보다기 민하게 파악하고 있는 만큼, 시종 일관 왕건의 의도대로 언동 을꾀하는권력밀착형의인물에도속한다고할수있다. 반면 유금필만이 왕건의 뜻을 거스르며, 다-2)C에서 연도 를 끊어 싸움을 승리로 이끈 회음후 한신의 고사와 같이 ‘무생 지계(無生之計)’, 사력을 다한 돌격을 주장했다. 기록에서 확 인되는 바, 이러한 유금필의 성정, 노선은, 왕건과는 다른 뜻 을 드러낸 경애왕의 성정과 흡사함이 엿보인다. 다)-2 B,C에 서는소극적공훤,적극적유금필이뚜렷이대비된다. 927년 포석정 사건을 전후한 엄중한 시기, 1만의 주장으론 공훤이 어울리지 않음이 확인된다. 즉 공훤은 위기를 타파하 고 적 선 (敵 線 ) 을 허 물 며 돌 격 할 성 정 의 인 물 이 아 니 었 다 . 또 B④936년조를 보면신검과의최후회전(會戰)에서도유금필 이 북방의 경기(勁騎)9,500명을 통솔한 것과 달리 공훤은 3군 의 원병,보급 역할을 맡았을 뿐 실제 전투에조차 투입되지 않 았다. 936년 당시 유금필이 마군(馬軍) 중에서도 최강의 경기 (勁騎)를 통솔한 반면, 고려군 편제에서 확인되는 37명의 장 수(견훤 제외) 중 공훤은 35번째로 거명되고 있다. 휘하의 기 병 역시 불과 300이었을 뿐이다. 븮高麗史븯권2世家2 太祖 19년(936) 9월8일(甲午)조 927년 경애왕이 구원을 요청한 당시 상황의 엄중함으로 미 루어, 불패의 무장, ‘상승장군(常勝將軍)’으로서 견훤을 두려 움에 떨게 하고,후백제의 포위망을 풀게 할 최적의 인물이 구 원군주장에선택되어야마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원군의 주장은 필히 유금필이었어야 한 다. 그는 923년 4월 북계(北界)의 골암진의 수장(戍將)으로 나가 북번의 추장 3백 명을 단번에 굴종시켰고븮高麗史븯권92 열 전5庾黔弼, 925년 10월에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충청 의연산(燕山),임존(任存)을 장악했다븮高麗史븯권92열전5庾黔弼 그 즈음 조물군(曹物郡)에서 견훤에게 열세였던 왕건을 돕 고자 충청에서 경북까지 진출, 군세를 일거에 반전시켜 견훤 의 화의를 이끌어낸 군신(軍神)이었다븮高麗史븯권1 世家1 太祖 8 년10월조, 븮高麗史븯 권92열전5庾黔弼. 포석정 사건 직후인 928년 7 월, 청주(靑州)의 왕건을 급습한 후백제 김훤(金萱), 애식(哀 式), 한 장(漢丈) 등 3천여 명의 군사를 궤멸, 왕건을 구명하 고 독기진(禿岐鎭)까지 추격, 왕건의 근심을 털어낸 ‘해결사’ 의 역할을 수행했다. 븮高麗史븯권92열전5庾黔弼. 935년 4월에는 도 통대장군(都統大將軍)이 되어 나주(羅州)로의 해상 통로를 회복하기도했다.븮高麗史븯권92열전5庾黔弼. 특 히 9 3 3 년 5 월 , 후 백 제 신 검 (神 劒 ) 의 날 선 공 격 앞 에 신 라 왕도가 위험해지자 불과 80명의 장사를 거느리고 후백제의 예봉을분쇄했다. 다-3)明年(933년)爲征南大將軍守義城府太祖使人謂曰 “① 予慮新羅爲百濟所侵嘗遣大匡能丈英周烈弓悤希等鎭之②今 聞③百濟兵已至 山城阿弗鎭等處劫掠人物④恐侵及新羅國都. ⑤卿宜往救.” ⑥ 黔弼選壯士八十人赴之. 至픕灘謂士卒曰: ⑦“若遇賊於此吾必不得生還但慮汝等同罹鋒刃其各善自爲 計.”士卒曰:吾輩盡死則已豈可使將軍獨不生還乎?”⑧因相與 誓同心擊賊旣涉灘遇百濟統軍神劒等黔弼欲與戰百濟軍見黔 弼部伍精銳不戰自潰而走.⑨黔弼至新羅老幼出城迎拜垂泣言 曰: “不圖今日得見大匡微大匡吾其爲魚肉乎.”⑩黔弼留七日而 還遇神劒等於子道與戰大克擒其將今達奐弓等七人殺獲甚多. 捷至太祖驚喜曰“非我將軍孰能如是?” 븮高麗史븯권92열전5庾黔弼 위의 다-3)의 933년 후백제 공격 및 신라 왕도의 위기 상황 은, 정확히 6년 전인 927년, 신라 경애왕이 견훤의 침공에 생 사의 기로에 처한 것과 흡사하다. 양자는 묘한 기시감마저 불 러일으킨다. 다-3)의기록에선 신라의 김부가왕건에게 구원 요청을 했 는지 확인되진 않는다. 하지만 다)-3 ②의 ‘금문(今聞)’이란 구절에서 왕 건은 당시 전황을 파악하고, 이를 위한 지속적인 적의 동태, 개전에 대한 정탐등을 위한 첩보및 보고 체제를 가동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 면 927년 당시에도 불안한 당시 정세로 보아 주밀한 첩보 체제가 가동되 었다고 봐야 할 것이며, 그 결과 왕건은 소상한 전황을 인지했음은 물론, 경애왕의구원요청이 있기까지선제적대응을회피한 데이어, 구원요청 이후에도즉각적조치를취하지않았다는의혹을지울 수없다.또한 933 년왕건의전언을전한 使人을파견한 것(다-3)①)으로 나타난 점에서,92 7년 당시 경북 북부 지방에 포진해 있던 고려군 진영에 즉각적 구원 명령 을전하지않은것역시의문으로 남는다. 이에 유금필은 단 80명의 장사만으로(다)-3⑥)사탄( 汎灘) (다-3)⑧), 자도(子道)(다-3)⑩)에서 연승하며 백제군의 전 열을 궤멸시켰고(다-3)⑧), 왕도의 백성을 구했으며 남녀노 소의 열렬한 환영과 치사를 받았다(다-3)⑨). 933년 5월 유금 필이 80명의 장사로 구원한 서라벌의 위기가,정작 927년에는 왜 125배나 많은 1만의 구원군, 특히 ‘경병(勁兵)(나-1) ③)’ 에의해서도해결되지못한것일까.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 비정(5) 뱚Ⅰ. 왕건의방관 뱚▶다음회에계속 박 순 교 뱚Ⅱ.고려1만구원군의종적 뱚Ⅲ.구원군의숫자1만은허구 뱚Ⅳ.구원군主將을둘러싼왕건 의저의 목 차 Ⅰ.왕건의방관 Ⅱ.고려1만구원군의종적 Ⅲ.구원군의숫자1만은허구 Ⅳ.구원군主將둘러싼왕건의저의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