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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4월30일 일요일 6 (제124호) 관향조 소식 밀직부사공(휘 양언) 단소 제향과 훈령 서원 숭절사에 배향된 두촌공(휘 양무),화 은공(휘 계은), 호재공(휘 맹문), 농암공 (휘 란)의 높은 학덕을 추모하는 제향이 지 난 달 31일 경북청도군 이서면 신촌리에서 전국성손60여명이참례한가운데있었다. 이날 제례는 우천으로 인해 훈령서원 본 당에 밀직부사공의 제단을 설치하고 상봉, 병조, 영덕 현종 순으로 헌작하고 집례 상 명, 축 희범 현종이 각각 맡았으며, 숭절사 제향에는 초헌관 성규, 아헌관 형곤, 종헌 관정규,집례 종상,축 희돈 현종이각각소 임을다했다. 밀직부사공의 휘(諱)는 양언(良彦)으로 밀성 대군(密城大君 휘 언침)의 8世 지손(支孫)으로 고려 중후기(제22대 신종~제24대 강종)의 1200 年間에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사부사(密直司 副使)를 지내 후손들은 관직을 따 밀직부사공파 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청도군 이서면 신촌 리를중심으로큰집성촌을이루고있다. 훈령서원은 밀직부사공의 8世 두촌선생(杜村 先生諱 揚茂)의 曾孫이신 화은선생(華隱先生諱 繼恩)께서 1471년 한재(大峴)에서 청도군 이서 면 신촌리(新村里-新安)로 옮겨 훈령산(薰嶺山) 아래에글방(書堂)을짓고글을 베풀어 교남사림 (嶠南士林)이 알고 즐겨 교통(交通)하므로 훈령 서당이 종사(宗事)를 보는 재궁(齋宮)을 겸하여 문(文)과 도의(道義)를 강론 육성하는 학당(學 堂)이 되어 유문(儒門)이 더욱 창달(暢達)되고 위선종사(爲先宗事)의 중심으로 오백년 전으로 부터종인(宗人)은강당으로일컬어오늘에이르 니역사가깊다하겠다. 불행이 1592년(선조25)의 임진병화(壬辰兵 禍)로 집이 불타고, 1623년(仁祖1)에 다시 중창 (重創)하여 훈령서당(薰嶺書堂)을 훈령재(薰嶺 齋)로 이름을 바꾸고 1844년(憲宗10)에 지산서 원(芝山書院) 창건(創建)을 병행하여 재사(齋 舍)를 중수(重修)하고 이듬해인 1845년에는 숭 절사(崇節祠)를 지어 입향조 두촌선생과 화은, 호재,농암 선생의 네 분의 선조를 배향하였으나, 1868년 대원군의서원훼철(毁撤)로없어졌다. 그후,1986년에 숭절사를 다시 복설(復設)하여 음력으로 삼월과 구월 상정일(上丁日)에 제향 (祭享)을올린다. 1908년에 중수한 본당(本堂)건물의 일부가 후 락(朽落)하고 빈약(貧弱)하다는 종론(宗論)으 로 종인(宗人)의 위선(爲先)하는 헌성(獻誠)이 마음으로, 돈으로, 넘쳐 웅장한 모습으로 태어났 다. 이에, 고을사람이 부러워하고 인하여 1999년 향도유림(鄕道儒林)이 훈령재를 훈령서원(薰嶺 書院)으로승호(陞號)하게되었다. 훈령서원 본당과 사당 서재가 있으며, 본당은 전면7칸에옆면 3칸으로 서까래 부연(婦椽)하고 대청마루는 3칸 우물정자(井)에 월간(越間) 들 보 두 개 를 얹 고 있 다 . 숭 절 사 는 정 면 3 칸 측 면 삼 칸의맞배지붕으로현건물은1986년에 완공되었 다. 서원 배향인물은 입향조 화은공의 아버지 두촌 공을 주벽으로 하고 차례대로 화은공,호재공,농 암공순으로배향되어있다. 자(字)는 약생(若生) 호(湖)는 두촌(杜村) 고 려 공민왕때 등제(登第)하여 선무랑(宣務郞)이 되고김천도독우(金泉道督郵)를하였다. 포은 정몽주선생 문인으로 종유(從遊)하며 우 공 현보(禹公玄寶-字는 原功 丹陽人)와는 막역 지우(莫逆之友)였다. 품성이 청백 단아한 준재(寯才)로 촉망(囑望) 되었으나고려의운명이다함을슬퍼하던중에13 92년고려가망하자벼슬을버리고성조용흥정오 문(聖朝龍興正午門)밖 만수산 깊은 골짜기로 퇴 거(退去)했다. 선생은 만수산 동지 제현(諸賢)과 우공현보 (禹公玄寶)를 향하여 나는 밀성(密城)의 후인 (后人)이라 내가 죽으면 선사(先祀)를 누가 받들 겠는가? 사직(社稷)이 없으니 나라를 위하여 무 었을 하겠는가 전가(傳家)하여 선세(先世)를 절 (絶)하지 아니함이 마땅하다. 밀주(密州)는 내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하시고 사립(도롱이와 삿 갓을 아울러 이르는 말.)으로 귀향(歸鄕)하여 화 양대성산(華陽大城山)에 은거(隱居)하고 자호 (自號)를 두촌(杜村)이라 하니 돌아가시고 사람 들이두촌선생이라하였다. 호(號)는 화은(華隱) 입향조 두촌선생의 증손 (曾孫)으로 총민(聰敏)을 타고나셨다. 어릴때부 터정성으로어버이를 섬기고 경학(經學)에뜻을 두어 명현대유(名賢大儒)를 찾아 경서(經書)를 익힘으로븮글이바르다븮고세상에알려졌다. 세조(世祖) 무자(戊子1468)년에 생원시에 들 고 한재(大峴)에서 신안(新安)으로 거쳐를 옮겨 훈령산아래서당을지어글을베풀었다. 더욱 교남(嶠南) 사림(士林)을 더블어 통래 (通來)하니 사림(士林)이 긍식(矜式)하고 문학 덕행(文學德行)으로 널리 추중(推重)되었다. 많 은 유문(遺文)이 있었다 하나 임란의 병화와 199 4년 도난 등 이대화액(二代禍厄)이 조상의 귀중 한말씀을거두어간것같아한탄스럽다. 호(號)는 호재(湖齋)이다. 증조(曾祖)는 휘 (諱) 영립(榮立)으로 현감(縣監)을 하고 조(祖) 는 발생(發生)으로 장사랑(將士郞), 부(父)는 생 원(生員)을 하신 계은(繼恩)으로 글공부를 타고 나서 아버지 말씀을 따르고 가전(家傳)을 긍식 (矜式)하여 소중히 섬기니 향방(鄕邦)이 그 효성 (孝誠)을 칭송하였다. 직제학(直提學) 최연(崔 淵)선생이 공(公)과 같이 경지(經旨)를 강론(講 論)하며 공(公)의 문망(文望)을 흠모(欽慕)하여 「공(公)의 견해(見解)는 우리 속유(俗儒)들이 미칠바아니다」라고하였다. 성종(成宗)때 관찰사(觀察使)의 특천(特薦) 으로 순천교수(順天敎授)가 되어 사림의 모범이 되었다. 1494(成宗甲寅)년에 태어나서 1557년(明宗12 丁巳)에돌아가실때까지많은일을하셨다. 중종(中宗) 임금때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진 사가 되고 칠곡(七谷)오수곡(五守谷)자연속에 정사(精舍)를 지어 정거(靜居)하며 삼족당 김선 생문(三足堂 金先生- 조선중기 문신 본관은 김 해. 字는 天佑)에 나가 의례를 강론하고 퇴계 이 황, 남명 조식, 경재 곽순 등 제선생(諸先生)과 교유(交遊)하며 높은 덕행과 밝은 수리(數理)를 떨치니제사림(諸士林)이추중(推重)하였다. 밀직부사공·훈령서원시향봉행 훈령서원화수회오는5월5일개최,장학금전달및축제의장될듯 숭절사제향후참례한 제관들이 함께하고있다.이날 제향에는 영동정공 후 무속공 종친회 정규 회장을 비롯 영덕 고문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권곤간사가참례하여종중사를 논의하는 등제례가더욱 빛났다. (사진 앞줄 왼쪽에서네 번째 성규시조왕릉참봉,다섯번째부터희돈축관,성규초헌관,형곤아헌관,정규종헌관,희준대종회장,종상집례순) 밀직부사공단소제관,왼쪽부터상봉,병조,영덕,상명,희범순 뱛두촌박양무선생(杜村朴揚茂先生) 뱛화은박계은선생(華隱朴繼恩先生) 뱛호재박맹문선생(湖齋朴孟文先生) 뱛농암공박란선생(聾巖公朴鸞선생) 밀양박씨 사문진사공파대종회 정기총회 및 시향 봉행이 지난 10 일,11일이틀에걸쳐봉행되었다. 1 0 일 오 전 1 1 시 봉 행 된 정 기 총 회에서 박원준 회장은 관심을 갖 고 협 조 해 준 종 원 여 러 분 에 게 감 사 드 린 다 고 말 하 고 현 재 추 진 중 인 대동보 편찬사업과 2012년 간 행된 정재일고 보급, 그리도 이틀 에 걸 쳐 봉 행 된 제 향 에 차 분 하 고 질서정연하게 참례하여 줄 것을 당부했다. 이날 총회는 박원주 상임부회장 의 사회로 2016년도 결산 승인 및 2 017년도 사업계획 및 예산안을 원 안대로 상정처리한가운데,2017년 사업을 보면 △대동보편찬 완료 △ 김제시 온천개발 종토수호 △선산 종토 재실 보존 보수관리 △숭조 애종심 고취 △정재일고 반질 및 처리 등으로 이중 대동보 편찬은 족보 구입희망 종원의 저조로 진척 이 부진하고 있어 정재일고 반질 등은 종원들의 적극적인관심이 필 요할것으로보인다. 재선생일고(貞齋逸稿)는 정재 박의중 선생의 문집으로 지난 2012 년 국역으로 발간한 것으로 정재 선생의 시·문, 고려사 열전에 입전 (立傳)된‘본전(本傳)’을비롯하여 변계량이 지은 만장(輓章)등 불사 이군의 충절을 지킨 선생의 일대기 를 엿볼 수 있어 소장가치가 높은 문집이다. 한편 10일(음3.4) 봉행된 사문진 사공을 비롯 아드님 휘 교연(皎 然), 손자 휘 기보(奇輔), 증손 휘 홍승(洪昇), 현손 휘 함( ), 5대 손 정 승 공 휘 화 (華 ) , 6 代 孫 휘 인 기(仁杞),간의대부공의 두 아드님 소부시판사공(小府寺判事,휘 琮), 이조좌랑공(吏曹佐郞公, 휘 球)의 제례에 이어 다음날인 11일(음3.1 5)에는 간의대부공(諫議大夫公 휘 仁翊), 정재공(貞齋公 휘 宜中)을 비롯한 4대 9위 등 12代 18位 선조 의제향이이어졌다. 사문진사공(휘 원)과 그의 아들 휘 교연(四門博士)은 학문이 뛰어 났다. 고려 때 과거제도를 보면 진 사 중에서도 특별히 학문이 깊고 당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사문학 (四門學)에 뛰어난 학자를 따로 뽑 았는데 이들을 국자진사(國子進 士)라 했다. 국자진사는 많아야 서 너명을 뽑았고 대개는 한두 명이었 다. 여러 학자들의 추천을 받아 국 자진사가 되기도 했다. 학문적인 명성이 전국을 뒤흔들 정도라야 여 기에 추천될 수 있어 학문 깊이를 가늠할 수 있으며, 간의대부(諫議 大夫)공 휘 인익(仁翊)은 고려가 망 함 에 따 라 전 북 김 제 로 낙 향 조 카인 정재공과 함께 불사이군의 충 절을지켰다.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삼송재(三松齋)定總븡시향봉행 뱚밀양박씨사문진사공파븣학문과충절의 표본이된선조의위업(偉業)기려 사문진사공후열선조6위단소제향광경. 사문진사공후열선조6위제단 제관 왼쪽부터여식축관, 원준대종회장, 건진초헌 관, 경영아헌관,성원종헌관,인석집례,원주상임부회장 삼학사를 따라 죽지 못함을 부끄 럽게 여기며 은거하여 호를 무은 (霧隱)이라 하고 은사(隱士)로 처 세 한 무은공 박세중 장군의 부조 묘 제향이 지난 17일(음3.21) 전북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곡촌마을 풍 양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55호) 에서 본보 상섭 편집국장의 집례로 초헌관 용식(전북 김제), 아헌관 근수(전북 김제), 종헌관 순완(전 북 남원) 현종이 각각 헌작하고 화 석 축관(좌상공파 대종회장)의 독 축으로 30여분에 걸쳐 차분하게 진 행되었다. 무은공 박세중 장군은 문무를 겸 비하였다. 자(字)는 군극(君極), 호(號)는 무은(霧隱) 또는 무웅 (武雄)으로 밀성대군 휘 언침의 21 세손이며, 좌상공 휘 춘의 8세손이 다. 1595년 남원에서 출생 23세에 무 과에 급제 1623년 인조개옥(仁祖 改玉)에 참여하여 정사원종공신 (靖社源從功臣)1등에 오르고, 인 조 2년(1624년) 甲子年 4월8일 어 모장군(御侮將軍) 행 월관진(行 月串鎭)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 制使), 인조3년(1625년) 乙丑年에 이괄(李适)의 난(亂)에 참모(參 謀 ) 장 만 (張 晩 ) 을 따 라 많 은 공 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 臣)2등에 올랐으며.인조6년(1628 년) 무진년 6월25일 어모장군 행 훈련원 부정, 등 주요관직을 걸쳐 인조 13년(1635년) 乙亥年 12월 2 5일 가선대부 행 호분위부사맹 겸 내금위장을역임하였다. 병자호란시 왕명을 받아 승지 최 온과 같이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상경 주화파(主和派)들의 건의로 강화(講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억지로 살고자하는 것이 사내가 할 일이 아니다(偸生非是 男兒事-투생비시 남아사) 삼학사 를 따라죽지 아니함이 부끄럽구나 (愧恨不從 三學士-괴한부종 삼학 사)라며시를남겼다. 숙종8년(1682년) 壬戌年에 왕명 으로 부조묘지전(不 튐廟之典-조 묘:원조를 합사하는 사당)하여 168 6년(乙丑)에 전북 남원시 대강면 풍산 261-3번지에 풍양사를 건립 배향하였다. 풍양사의 면적은 417㎡이다. 전 면 3 칸 , 측 면 1 칸 의 일 (一 )자 형 맞 배지붕 건물로,부연(附椽)과 방풍 판을 달고, 앞에 툇간[退間]을 두 었다. 한편 이날 제향 후 문중 순옥 회 장은 우천에도 불구하고 원근을 마 다하지 않고 참례해 주어 무사히 마 칠 수 있 어 기 쁘 다 고 말 하 고 방 계(傍系)이면서도 참석해준 행순 (幸淳)고직당공 종중 회장에서 감 사의인사를전했다. /박흥식명예기자(광주광역시) 무은공박세중장군부조묘제향봉행 뱚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1등 뱚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2등 제례에참례한 제관 및집사분들이 함께하고있다.이날 제향에는군입대예정인용 식초헌관의아들철명(앞줄왼쪽에서두번째)군이 참례선조의유훈을기렸다. 풍양사전경. 밀성박씨 백우당공파 종중(회장 래지)은 지난 9일 오전 11시 전남 장성군 황룡면 신촌마을소재 경모 재에서 어모장군을 지낸 휘 사순, 백우당 상의, 선교랑 군자감참봉 휘 윤감(允鑑)과 그아 네 아들 행 간(行簡), 행경(行敬), 행민(行 敏), 행중(行重)을 비롯한 이하 선 조 7代16위 선조 시향을래지회장 의집례로엄숙봉행되었다. 지난해 전임 재구 회장의 뒤를 이어 취임한 래지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의 봉사정신으로 재사(齋 舍)를 찾는 종원들에게 믿음을 주 면서 이날 제례 또한 질서정연하게 봉행되어 종중의 운영의내면을 들 여다볼수있었다. 백우당 박상의 선생은 어모장군 공의 아들이다. 1538년 7월 1일 전 남 장 성 군 황 룡 면 보 룡 산 기 슭 하 남에서 태어나 천문지리에 능통하 여 세 칭 소 강 절 선 생 이 다 시 태 어 났다 하였다. 사재감과 전옥서 주 부를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명나 라 양호 장군이 군사(軍師)로 예우 하였고, 1578년 율곡 이이, 중봉 조 헌, 토정 이지함, 구봉 송익필 등과 하늘의 장성(長星)을 보고 앞으로 국운을 논의하면서 15년 뒤에 븮靑 衣賊入自國城東門븯 ‘왜적이 장차 서울 동문으로 쳐들어 오리라’하 고 예언을 하였으나 누구하나 믿지 않았다. 다만 율곡 이이는 이 말을 귀담아 듣고 임진강변에 화석정을 짓고 들기름을 먹여두어 후일 선조 의 피 난 길 에 칠 흑 같 은 밤 에 강 을 건너기 위해 이 정자에 불을 붙여 무사히 강을 건넜다는 일화를 남겼 다. 백우당공의 아들 윤감은 군자감 참봉으로 네 아들 중 넷째 매헌공 휘 행중은 1641년 11월 12일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매실마을에서 태어 났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 봉양에 소홀함이 없었고,아버님이돌아가 심에시묘하고,어머님이 돌아가심 에 예법과 슬픔이지극하였으되 상 복 입은 기간이 부족하다하여 한 발자국도 시묘(侍墓) 밖에 나오지 아니하면서 6년 동안 초상 때와 같 이 하였으며, 아버지 없는 어린 조 카들과 어머니 잃은 생질들을 모두 보 살 펴 혼 인 못 한 일 이 없 게 하 였 고, 가난한 친구가 별세하면 장지 를 마련해주고, 오고갈 때 없는 사 람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는 등 배 려와 나눔의 실천을 평생 이어갔 다. 특히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에 깊은 연구력을 다하여 평생 몸 가짐이 충효에 힘을 써 매헌처사로 통하였다. 한편 제향 후 가진 총회에 앞서 래 지 회 장 은 항 상 잊 지 않 고 참 례 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훌륭한 선조님의 음덕을 기 리며 추원보본의 정성을 다하자고 말했다. /자료제공박지현(밀성박씨 전국청년회 부회장) 천문지리에밝아임진왜란을예언한백우당박상의선 생추모제향봉행 경모재(景慕齋)백우당공이하16위선조 제례 봉행후 오집사(五執事)를 비롯한 종원들이 함께하고있다. 앞줄왼쪽부터축관 재구,초헌관 경섭,아헌관 동구,종헌관 래만,래호,집례래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