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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4월30일 일요일 12 (제124호) 기획·서원 탐방 울산박씨 관향조 장무공(휘 윤웅)을 비롯하여 그의 十六대손으로 고려 말의 충신인 사은공(沙隱公) 휘 추(諏)와 유 은공(柳隱公) 휘 유(愈), 조선조 임진왜 란끹공신인학수당(鶴睡堂)휘홍춘(弘 春)을배향하고 있는 학산서원의 존덕사 (尊德祠)춘향이 지난 14일(3월 中丁)울 산지역유림주관행사로이어졌다. 학산서원은 울산박씨의 대표적인 서 원으로 원래 1851년(철종2년 辛亥) 사 림(士林)과 자손(子孫)이 공의(公儀) 로집성촌을이루고있는양산시웅상읍 용당리 후록에 용강사를 창건하여 흥려 백 장무공을 주향(主享)하고 사은공(沙 隱公 諱 諏)을 배향하여 향례를 봉행하 였으나 1871년(고종8년 辛未)에 방령 (邦令)으로 훼철(毁撤)되어 향화(香 火)가 단절(斷切)되어 1905년 설단하여 제향하다 1988년 8월13일 태화동 진미 식당에서 각파대의원 50명이 참석한 가 운데 말응문중의 학수당공 후손 원식 (源植)현종이 제의(提議)하기를 “용강 사의 복원도 좋은 일이나 여생이 얼마 남지않은내가무슨욕심이있겠나하면 서우리 문중땅(태화동산36-6)일천여 평을 대종회에 헌성하겠으니 옛 장무공 선조의 소거지이며 주 활약하시던 곳이 고 유림들의 출입과 후손이 참여하는데 도용이하니이곳에거각을지어앞으로 서원으로 만들면 좋겠다.” 하여 1986년 3월 31일자 1차 공사에 사당,강당,삼신 문 대문을 정하고 2차 공사는 종택을 짓 고 3차는 동서재와 전사청과 관리실을 짓고 2003년 단답(壇畓)일부를 매각하 여 전사청과 존양재(存養齋)를 건립하 고 신도비를 수립(竪立)하였으며 2004 년 12월부터 2005년 8월까지 존덕사(存 德祠) 경내의 배위석(拜位席)에 석판 (石板)과 사 당 주 위 (周圍)에 모 두 석 판 (石板)을 깔았고 계단(階段) 양편에 손 잡이 공사 스텐레이스 재료로 시공하여 승강(昇降)에 편의를 도모하고, 2005년 (乙酉) 9월 중정(中丁)에 향도유림 파 록(爬錄)으로 신도비 수립(竪立)과 위 패(位牌) 4位 제위봉안고유(題位奉安 告由) 행사를 마치고 매년 음력 3월 中 丁일에지역유림행사로치러진다. ▲장무공(莊武公)의 휘는 윤웅(允 雄)으로 울산박씨의 관향조이다. 세상 에서 드문 뛰어난 자질로 고려 태조를 보좌하여 삼한(三韓=백제.고구려.신 라)을 통합하자 대장군으로 발탁되고 통한익찬 공신(統韓翊贊功臣)으로 기 록하면서 그가 살던 울산군(蔚山郡)을 흥려부(興麗府)로 승격시키는 동시 특 별히 흥려백(興麗佰)에 봉하고 시호를 장무(莊武)라 내려주었으니 고려를 일 으켰다는말이었다. ▲사 은 공 (沙 隱 公 )의 휘 는 추 (諏 ) , 장무공의16世이다.일찍이문과에급제 하여 한주군수(韓州郡守)와 충청감사 를역임하였다.고려국운이종말에고하 자 갓 을 벗 어 성 남 (城南)에 걸 어 놓 고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울음으로 이별 하면서 시를 지어 이르기를 ‘두견새는 촉나라의 삼춘(三春)을 피눈물로 요양 (遼陽)으로 돌아가는 학은 만리의 마음 일세’라 하였다. 울산부 북쪽 사량동으 로 돌아와 종신토록 두문불출하면서 마 침내충성의의분으로일생을마쳤다. ▲유은공(柳隱公)의 휘 유(愈), 종 형인 사은공과 더불어 문과에 동방급 제하여한림학사로남평감무가되었다 가 역시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 섬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아들 정랑공 (正郞公, 휘 근)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 여려 어진 이와 울면서 이별하 며 시를 읊어 이르되 ‘죽기를 맹세하고 스 스 로 그 뜻 을 지 켜 하 려 는 데 나 는 장 차 어디로 갈것이냐.세상과함께 세월 을 쌓아가 아름다운 이름을 천추에 전 해가리’라 하였다. 오류동에 은둔하여 절의를굳게지키다가세상을떠났다. ▲학수당공(鶴睡堂公)의 휘는 홍춘 (弘春)으로 사은공의 6대손으로 남달 리 뛰어난 지략으로 문무(文武)를 겸 전하였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선 전관(宣傳官)과 훈련원 주부를 역임하 고 언양, 기장 두 고을의 수령을 지내 면서가는곳마다많은치적을남겼다. 벼슬에 더 진취할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쉬고 있다가 임진년 왜 란을 당하자 분연히 창의토적하여 병 란을 평정하고 국가를 보위하여 1등공 훈에참여하게되었다. 한편 이날 제향에는 지역유림과 후 손들등100여명이봉안된현인의충절 (忠節)을기리기위해줄을이었다. 울산박씨 학산서원 시향봉행 사진위서원전경.아래제향광경 봉안된현인의충절잇기위해 지역유림발길이어져 고려 말 불사이군의 충절을 보인 송 은 박 익 선 생 과 두 아 들 아 당 공 (휘 調 ) , 졸당공(휘 聰)의 높은 학덕을 추모하 는 제향이 지난 10일(음3월 中丁)사우 가 있는 경남 산청군 신안면 진태마을 신계서원의정충사에서경남지역유림 주관행사로있었다. 이날 추모제향은 서원 강당에서 오전 10시 개좌에 이어 이완규 원장의 배향 선 현 소 개 및 오 집 사 소 개 에 이 어 정 충 사 (貞忠 祠)로 옮 겨 문 병 운 (경 남 산 청 ) 집례의 집전으로 초헌관 김창효(경남 진주),아헌관 권쌍현(경남 산청),종헌 관 이 도 기 (경 남 진 주 ) 순 으 로 각 각 헌 작하고 임차영(경남 진주)축관의 독축 으 로 4 0여 분 에 걸 쳐 엄 숙 봉 행 되 었 다 . 신계서원은 단성(丹城)의 유림들과 단계(丹溪)에 살던 후손 상채(後孫 尙 采)와 그 외 운잉(雲仍)들의 협력으로 1836년(丙申 헌종2)에 착공하여 1869 년(己亥)에 工役)을 마쳤다.규모는 사 우 3칸, 강당 5칸, 그리고 대문 3칸, 서 재 3칸, 주고(酒庫) 3칸, 소루(小褸) 4 칸이다. 원호(院號), 사호(祠號), 문호 (門號) 등의 편액(扁額)은 감역 이충 익(監役李忠翼)이글씨를썼다. 헌종 5년(1839) 신계서원 정충사(貞 忠祠)에 송은 박익선생을 주벽으로 영 정(影幀)을 봉안하고 아당(啞堂), 졸 당(拙堂) 두분의 배향하고 춘(春) 3월 추(秋) 9월 중정(中丁)에 유림에서 봉 향(奉享)하였다. 1847년(헌종13)에 신계서원 유생들 이 예조에 송은 선생의 숭모의 향사를 받드는절차와범백을다갖추었으니대 현(大賢)을 받드는 전당(殿堂)이 오래 토록 보호받고자 신계서원의 사액(賜 額)을 청원상언(請願上言)하니 예조실 록에 부표(付標)되었다.이에 이듬해(1 848 戊申) 춘향시부터 단성현감에 폐백 (幣帛)과제수(祭需)를보내왔다. 1868년(고종5 무진(戊辰))에 조정 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모든 서원 이 훼철되니 신계서원 역시 1871년(辛 未 ) 에 훼 철 됨 으 로 향 사 받 드 는 일 이 중 단되고 선생의 영정 또한 봉안하지 못 하였다. 1875(고종12 乙亥)년에 子孫들의 합 모(合謨)로 응봉산 중턱 현 위치에 영 정각(影幀閣)3칸과 세한재(歲寒齋)3 칸을 건립하여 송은선생의 영정을 봉 안하고 후손들이 춘추로 향화(香火)를 받들었으며학당(學堂)으로이어졌다. 그후 1917(丁巳)년에 향중(鄕中)의 유림들의 공의(公儀)로 송은선생 위판 (位版)을 복설(復設)하여 3월 중정일 에 석채례(釋菜禮)로 봉향하였으며 사 림이 회강(會講)하고 유계안(儒 싸案) 도성안(成案)되었다. 1939년(丙子)에 재사(齋舍)가 노후 (老朽)하여 보전이 어려웠고 유생들의 회강(會講)하기에 협소 하여 후손들이 일을 맡았고 유림들이 도와 세한재(歲 寒齋)를 철거하고 중건5칸하여 재호 (齋號)를 신계정사(新溪精舍)로 사호 (祠號)를 송은선생영당(松隱先生影 堂)으로 다시 현판(懸板)하고 유림들 의강학지소(講學之所)로이어졌다. 1985년(乙丑)3월 채례시(菜禮時)에 유림들이 신계서원을 복원하자는 공의 (公 儀 )가 있 은 뒤 후 손 들 이 그 일 을 맡 았고,유림들이 도와 經營하니 사우3칸 과 내삼문 그리고 대문3칸을 중건하고 주위를 정화했으며 제기 18점이 지방 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어 관리당국 에서 문화재 보호각(東齋) 3칸을 중건 하였으며 원우(院宇)를 번와( 붕瓦)하 고 보수를 하였다. 1989년 3월 11일 신 계서원 복원을 조성하니 송은 선생을 주벽으로 봉안하고 아당, 졸당 두분 선 생을배향하여3월중정일에배향한다. 신계서원의 내삼문의 문호를 집현문 (集賢門)이라 하였으며 사당인 정충사 (貞忠祠)로 통하는 문의 문호를 불이 문(不貳門)이라 하여 송은선생의 불사 이군의충정을나타내고있다. 한편 이날 향사에는 지역 유림과 후 손 등 60여명이 참례하였으며, 신계서 원의 신임 원임(院任)에 하행락 유학 자가 취임하였다. 신임 하 원임은 진주 에 거주하고 있으며, 지역유림의 추앙 을 받고 있어 신계서원이 더욱 활력이 넘칠것으로보인다. /박순제명예기자(경남산청군지부) 송은 박익 선생과 두 아들 추모제향 봉행 신계서원전경. 임차영축관이삼헌관이지켜보는가운데사당 에서사축을하고있다. 이날제례는엄격한예 법을그대로재현하여참례한유림과후손들에 게좋은본보기가되었다. 경남산청신계서원 경남지역 유림향사 부패(腐敗)와 권력이 난무(亂舞)하는 시대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바로잡으려 했던 오졸재 박한주(迂拙齋朴漢柱1459 -1504) 선생과 충(忠), 효(孝), 인(仁), 예(禮)를 몸소 실천해온 국담 박수춘(菊 潭 朴壽春1572-1652) 선생의 추모제향 이 지난 11일(음3.15) 위패가 봉안된 남 강서원 양현사에서 경북지역 유림향사 로엄숙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오전 일찍부터 지역 유림 들이 속속 찾아오고 11시 개좌(開座)에 서 집사분정 후 양현사(兩賢祠)로 자리 를 옮겨 서석목(徐錫睦, 대구), 이두옥 (李斗玉, 청도), 정재홍(鄭在洪, 대구) 유학자 순으로 헌작하고 집례 김재운(金 在運, 대구), 대축 윤칠노(尹七魯, 청도) 유학자께서각각맡았다. 초헌관으로 헌작한 남강서원 이석목 원 장은 음복 후 가진 강평에서 초헌관으로서 훌륭한 선현의 추모제향에 헌작하게 되어 무한한영광을입었으며,어젯밤부터내린 비가 아침까지 지속되어 걱정하였는데 향 례시간에 맞추어 화창하게 갠 것은 아마도 선현들의 도움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보 며,후손들의열성에감사드린다고말했으 며, 종유사(宗有司)를 맡고 있는 박도흠 前숭덕전참봉은지역에서추앙받고있는 유림인 들이 대거 참례하여 주어 후손의 한사람으로서감사드린다고말했다. 남강서원(南岡書院)은 경북 청도군 각북면 남산2리에 소재하고, 서원이 자 리 잡고 있는 각북면 남산2리는 1587년 에 국담 박수춘 선생이 터를 다지고 예숭 (禮崇)의 동풍(同風)을 동민들의 생활 속에 심은 후 대대로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1691년(숙종20)에 사림 (士林)의 공의(公議)로 건립 국담 선생 을 봉안하였고 그 후, 23년 뒤에 오졸재 선생을 추가로 봉안하고 사우(祠宇)를 양현사(兩賢祠)라하였다. 대원군의 서원훼철(1868년)의 불운을 맞기까지 200여년 간 영호남의 유풍진작 (儒風振作)과 인재양성 등 명실공이 충 효정신의본산이었다. 남강서원이 훼철된 후 일제 침략의 36 년과 6·25동란 등 시대적 변천은 다사다 난 하였고, 130년이 지나는 동안 서원 복 원은누대(累代)의숙원이되었다. 1995년에 이르러 후손 박양흠(朴陽欽) 현종이 1억원의 거금을 헌성함을 계기로 후손들의 열화와 같은 정성과 헌성으로 붐 을 일으켜 수천에서 수백만원 혹은 수십만 원씩 각자 형편에 따라 헌성하고 사림들의 헌성이 이어져 서원복원을 결의 1995년 8 월 29일 서원 기공식에 이어 1998년 11월 6 일서원을복원하고봉안식을갖게되었다. 서원에는 국담선생 추선록(목판본 21 .6×31.8)을 포함한 다양한 고문서와 교 지, 당시의 편액, 제기(祭器), 당대의 거 유(巨儒)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이황, 정여창과 나누었던 유묵이 있으며 국담 집, 추선록, 자손록,밀성박씨 연계도, 선 현유묵, 양현록, 오졸재 실기, 남강서원 청액소,등이목판으로보존되고있다. ▲오졸재 박한주( (迂拙齋 朴漢柱 1459 -1504) 부패(腐敗)와 권력이 난무(亂舞)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청렴결백하고 맡은바 직무수행에 살신보국(殺身報國) 혜성 (彗星) 처럼 빛나는 현인이 있으니 바로 오졸재 선생인가 한다.선생의 휘는 한주 (漢柱) 자(字)는 천지(天支) 호는 오졸 재(迂拙齋)이며밀성인(密城人)이다. 1459(세조4)년밀양부풍각현흑석리차 산(현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에서 문절공 도은(文節公 逃隱) 선생의 증손으로 태어 났다.16세때점필재김종직(1431~1492조 선전기의 성리학자·문신. 영남학파의 종 조) 선생의 문하에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선생등과동문수학하였다. 성종때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 에 제2등으로 급제하여 직장(直長), 감 찰(監察)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 言)으로제수되었다. 성종이 유교존숭(儒敎尊崇)하고 문교 정치(文敎政治)에 주력함에 신명을 다 하여 충성을 바쳤다. 그 때 이세좌(李世 佐) 등 임금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을 탄 핵했다가 추문(推問)을 받아 성균관 전 적(成均館 典籍)에 옮기게 되자 母夫人 을 봉양해야 한다는 뜻을 담아 외관직을 청하여창녕현감으로나갔다. 1497(연산3)년에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 겸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 官)에 제수되었으며 간관(諫官)이 되어 왕의 실정(失政)을 극간(極諫)하고, 노 사신(盧思愼)·임사홍(任士洪)을 탄핵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두 간신(奸臣)의 모함(謀陷)을입기도하였다. 선생은 험난한 조정의 간신을 지척(指 斥)하고 군심(君心)을 바로잡기 위하여 직 간하였다. 친구들은 보신(保身)하라 하였 으나 선생은 「신하가 직도(直道)로 섬기다 가 갈 뿐이다.사생(死生)은 하늘에 메였으 니 어찌 자신을 도모(圖謀)하여 불의에 빠 지는임금을그냥볼수있겠는가」하였다. 선생의 나이 40세 되던 무오사화(戊午 士禍)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점필제 선생의 문도(門徒)로서 붕당(朋黨)을 만 들어 국정을 비평(批評)하여 시사(時事 ) 를비방하였다는죄목으로경사(京師)에 나치(拿致)하여 80도로 결장하고 벽동 (碧潼)에 부처(付處)했다가 3년 만에 호 남의 낙안군으로 이배되어 그 곳에서 후 진을 훈회(訓誨)하여 최두산(崔斗山)과 같은 많은 명사들을 배출 호남학문의 연 원이선생으로부터나왔다하겠다. 1504년(연산10) 5월 15일 갑자사화로 화를당하니선생의나이46세이다. 선생이 영면한지 13년 뒤인 1517년 도 승지(都承旨)에 증직(贈職) 되었으며 13 3년이 지난1634년(인조 15)에 예림서원 (밀양시부북면후사포리)에배향되고17 2년 이 지 난 뒤 에 학 사 김 응 조 (鶴沙 金應 祖)가 여표비명(閭表碑銘)을 지어 선생 의구여(舊閭)인차산(車山)에세웠다. 선생을 제향하는 서원은 사액서원(賜 額書院)인 밀양의 예림서원,청도남산의 남강서원,함안의덕암서원,청도풍각의 차산서원, 풍각 흑석의 석강서원이며 문 집으로는오졸재선생실기가있다. ▲국담박수춘(菊潭朴壽春) 선생의 본관은 밀성으로 휘는 수춘(壽 春), 자는 경로(景老), 호는 국담이다. 고 려 때시중(侍中)밀성군(密城君)휘 언부 (彦孚)의후예이고,고려조의보문각태학 사이며 전문형(典文衡)과 중국 원나라에 서 한림학사(翰林 毅 士)를 지낸 충정공(忠 情公, 휘 세균) 행산 선생의 9세손이고 문 절공(文節公) 도은선생(桃隱先生) 휘 문 빈(文彬)의8세손으로숭정처사라한다. 숭정처사란 조선의 선비들이 그토록 사 대(事大)하든 명나라가 오랑캐로 불리던 청나라에게 망하자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 가지 아니하고 은둔해버린 선비를 일컫는 말로 전국적으로는 몇 분이 있다. 이중 국 담 박수춘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국담 선 생의 삶은 충(忠), 효(孝), 인(仁), 예(禮) 를 친행(親行)한 생애(生涯)라 하겠다. 정유재란에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일 으 켜 망 우 당 곽 재 우 와 함 께 창 녕 화 왕 산 성을 고수(固守)하였고, 광해가 인목대 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 )시켰을 때 간신배의 기세가 하늘에 닿았으며 명유(名儒)들이 쫓겨나고 온 조야(朝野)가 진동(震動)해도 이에 대 해 말하는 이가 없으니 선생은 홀로 소를 지 어 대 궐 에 나 가 극 언 (極 言 )하 고 간 신 배들의죄상을역설하였다. 丙子年청나라에의해 서울이 함락되자 의병을 일으켜 北上중에 인조가 삼전도 (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 를 한 뒤,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는 소식 을접하고선생은침식을잊은채(入山甘 作崇禎士 世羞 丙子民-산에 들어가 숭정 사 되려한다. 병자년 백성으로 세상사는 게 부끄럽다네.)라는 시로서 분통과 충절 을 표출하였으며 그 후로는 세상사와 단 절하고 산중에서 학문을 닦고 강론하며 후학을양성하는데에만전념하다. 일신(一身)과 집안의 위험을 무릅쓰 고 오 직 의 (義 )를 위 해 헌 신 한 것 이 다 . 그리고 선생은 효성에 지극하였고 뭇 사람들에 대한 교화( 化)에 심혈을 기 울였을뿐만아니라성리학의학자였다. 1625년(효종3) 11월 8일에 81세를 일 기로 고종(考終)하니 사림(士林)들의 애통함이 친상(親喪)을 당하듯 하였으 며 야노산승(野老山僧) 까지도 눈물의 바다를이루었다한다. 1672년(현종13)에 통정대부 호조참의 (通政大夫 )에 증직되고 밀양 후포에 불천위(不遷位)로 전향(奠享)하 며 청도 남산의 남강서원과 대구 동구 망 우당 공원내 임진왜란 충의탑(忠義塔) 감실(龕室)에 봉안 전향(奠享) 한다. 저 서로는 독서지남( 倆書指南), 학문류해 (毅文類解), 도통연원록(道統淵源錄), 동방학문연원록(東方 毅問淵源錄), 의례 견 문 록 ( 疑 見 見 聞 錄 ) , 국 담 선 생 문 집 록 (蘆潭先生文集錄) 등이 전해지고 국담 선생문집판목이보존되고있다. 오졸재 박한주·국담 박수춘 선생 추 모제향 봉행 남강서원븣지역유림선현의높은얼기리는행렬이어져 향례에 참여한 유림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부터 초헌관 서석목, 아헌관 이옥 두,종헌관정재홍,집례김재운,축윤칠노,알자서상익,맨왼쪽직일박도흠. 개좌에서집사분정록을 확인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