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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수로 참여한 생존군인(현재 제주도에 거주), 그리고 선무공작 대장 으로 학살현장에서 연설을- 한 전국회의원과 당시 월야지서장, 월야지 서 순경의 증언서들은 확실한 양민학살의 증거들이다. 불론 유-족측의 증-언과 학살현장의 생존자 증언서도 입증-의 자료로 충분하다. 또 12월9일 월야면 외치리 외치마을에서 가정별로 장자만 22명을 뿜 아 전 주민이 보는 앞에서 l명을 사살하고 2명은 외치재 산위로 장직­ 을 운반토록 보내서 샅있·고, 연락탱과 지-주 마주쳐시 안렌이 있는 2명 은 삼려주고 17명은 해보면 두리샘 뒷산애서 사삼하였다. 그리고 나산면 이문리 사징마을에시도 집에있는 사람들은 물론 학교 를 디-녀오는- 중학생동 10여명을 이문초등학교 옆 논에서 학살하였다. 1950년 12월31 일 해보변 대창리 쌍구룡이 l 들어온 5종대 문인들은 마 을 사람들에게 헤 _t;1_떤 소재지로 피난을 가도록 가기-호호 방문하며 명 령을 시달한 후 피난가는 주민을 향하여 총을쏘아 노소흘 가리지 않고 학살하였고 양심이있는 군인은 7살의 어린 소녀(이금남)가 총상을 당 하고 죽지 않은 상태염을 발견하고 수징- 않도록 도와주어 생1성을 건졌 다 1951년 1월 12일 해랜.떤 상곡리 주민들에게도 면소재지로 펴난가도 촉 한 후 피난대열에 총을 난사하여 ?-차별 학살하였으내 이를 은폐하 기 위해 죽은자들올 쌍구룡 도군변의 플샘에 수장시키는 잔인한 방볍 도 사용하였으나 모평과 쌍구룡에서 해보양민 128명을 학살하였다. 1951년 l월 14일 나산면 우치리 소제마을에시는 인근 해보변 모평과 쌍구룡애서 학삼당하는 소분을 듣고 5중대 군인이 마을로 접근하자 젊 은사람과 건강한 사람블은 모두 피신하였고 노약자들만 집에 있다가 마을 앞 논에서 36명을 학살하였다_:..L외 12곳 지역에서도 2~7명씩 학살당하였다. 6. 희생자를 위한 명예회복 노력 가. 국회차원 - 9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