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page

소문은 무성하지만 누구도 그 규모와 진상규명에 대해서는 언굽윤 기피하고 있는 상태다. 이 러한 것들에 내해 펼자는 차후에 접근하려는 숙·제로 넘겨두기로 했다. 또한 (3) 항에서 언급 한 양민은 좌익노 우익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성향을 가질만한 지식이나 의식초차 없었 던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해 그 이남에 었던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하지 못해 지리산이나 불갑산으로 들어 가 무장활통옴 하면서 군 ·경을 포함한 대 한민국 체제에 저항하고 있던 1950년 10월부터 이들 좌익무장 세력이 소멸될 때까지 우익이 나 우익에 가까운 사람들은 최소한 읍 단위 이상의 도시로 피신했고 좌익이니 좌익에 가까운 사람들은 지리산이나 불갑산으로 피해 리 단위 이하의 놓촌 마을에는 좌·우익괴 전연 관계가 없는 사광늘-주로 노약자나 부녀자들만 남아 있었다 31) 이들은 사상적으로 의운의 여지가 전연 없는 선량한 국민이자 양민이다 36)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양민’은 이들올 말한다. 다시 말하면 1951년 3월 29일 신중목이 국회에서 거창사건올 폭로할 때 사용한 ‘푸고한 양민’이 여기에 해당된다 또한 당시 조냉옥 내무·김순연 법무부장관이 거창사건올 국회에 보고짤 때 ‘희생자의 대부분이 양민’이라는 표현이 이에 해딩된다 37) 학살의 유형은 네 가지다 (1) 작 전상의 학살이디. 공비보번올 하던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여기에 해당된다. (2) 처형드로서 의 학살을 듣 수 있다. 사상법으로 수감돼 있었거나 보도연맹원을 짝살한 사례기- 이에 해 당 된다 (3) 보복으로서의 학살올 밀한다. 여기에는 공적 보복과 사적 보복으로 세분할 수 있 다. 힘평 양민학살을 공적 보복으로서의 학살이라 한다변 진도군 세퉁펴의 비극은 사적 보복 으로서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4) 회생양으로서의 학살이다. 1951년 2월 20일 육군 11사단 20인대 2대대가 불갑산 꽁바토별을 위한 ‘대보릅 작선’을 전개할 당시 ‘공비’틀과 함께 있었 던 숱한 민칸인들을 ‘공비’에 대한 공격파 동시에 마구잡이로 발포하여 사신한 사례가 이에 해당된다. 이 떼 불갑산에서 희생 된 1α)5명의 대부분이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무장 게렬라틀 은 이미 ßHI.져 나갔는데도 무차별 공격이 진행됐던 것이다 이 작전에시 군의 피해는 단 3맹 에 불과했었다 38) 35) 산으」륙 간 사람 가운데는 미록 좌익이니 좌익풍조자가 아닌떼도 해당 지역의 유지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들의 세력올 파시하려던 죄익세력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사람틀도 있었다. :)3) 1930년 6월 8일 「양민학잘사건진상조사위윈회」 全南班 조사위원 劉£품 의원과 *때되 의원이 월야-해보 냐산면 -0: 1 살현장을 초사할 때 季ii.燮 나산연장옹 학싣당한 사랑동융 가리켜 ‘공산당에 가까운 사링은 요두 ~J산해 버리고 양심 상 거리낌이 없는 양민’이라고 진솔했고, 鄭-雄 중인은 ‘우익반동가족이라고까지 지직받았던 사랍. 자기양심에 비주 어서 아부런 최목이 없다는 사립이 납아 있다’가 학살당했다고 진술했다(r국회양민학살사건진상조특번시위윈회 속기 흑-전냥반 종언 청취항J, 100J년 5월 21연) 37) ,동아일보시, 앞의 책, 잃4-345 쪽. 3S) 학살의 유형은 김동춘의 분쥬에 의존했다. 김동춘은 (1) 작전으로서의 학살 (2) 처엉으로서의 학살 (3) 보복으로서 의 학상 (4) 사척인 보복으로서의 학살로 분류했다(김용춘 r전쟁괴 사회J, 톨베개, '2fXJJ. aß 쪽) . 그러나 김농춤의 운류에 풍창한 조현연은 깅동훈의 문유 (-1) 항 私的 보꽉£로서의 흥}상 내신 무책임과 희생양으쿄서의 학상로 대입하 고 있다(조현연 r힌국 현내정치의 악몽-국가쪽력」 잭세상. æro. 53 쪽)‘ 필지는 깊풍춘의 분듀에 동의하면서토 ‘보 복으로서의 학쌀’을 ‘公的 보복·파 ‘私的 보복’으혹 세분혔다. 함명에시 있었던 양인학삼올 ‘公的 보복으로서의 학상’ 이라 할 수 있다연 집안끼녁의 감정 씨움으로 우익괴 좌익으로 갈라진 채 벌어졌던 진도 세둥리의 비극을 ’사적 보복 으쿄서의 학살’로 들 수 있다(박찬숭 r한국전쟁과 진도 동측D}올 세동리의 tl]극J, 한국역사연구회 r역사와 현실J, æro년 12월호(~호) Z10쪽) 그리고 (1) 항 조현연의 무책임과 희생으로서의 학살융 휠자는 단순하게 ‘희생양으혹 서의 학살’로분류했다 - 7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