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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확인사실시 까지 보살펴서 살아난 ‘양채문(월야거주)’의 생생한 증언은 눈물이 겨울- 정도이며, 총을 맞았으나 정신을 잃은 덕택에 살아난 ‘정남숙(손불면 석창리 거주)’은 그때의 상처로 고 생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 다. 당시 함평경찰서 월야지서장 ‘이계필(서울거주 사망)’도 증언을 통하여 “중대장이 정신병자가 아니펀 그 많은 양민을- 학삼할 수 없다, 그때 경찰은 아무런 힘이 없어서 제지 못했다”며 눈불을 흘 리며 그때를 회상하면서 학살 사실증언서를 주었습니다. ~E 당시에 월야지서에 근무했던 ‘오정인(함평읍 거주)’순경도 같 은 맥락의 증언을 하며 학살 사실증언서를 작성해 주었습니디 3. 1950년12월9일 월야면 외치마을에 서도 양민 18명이 학살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광주직할시로 연결되는 국도 22호선 도로를 꿀착하여 작전차량 통행을 방해하였다며 동조자를 색출한다며 주민을 기-족단위 로 앉힌후 젊은 사람만 22명 을 골라낸후 그자려 서 1명을 총으로 싹 죽이고쓴 중대본부로 데리고 가는 도증에 연 릭-병과 매일 마주친 젊은이 한명은 돌허 보내고 외치재 정상에 나 무를 운반한 2명도 보초병의 도움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외치마을 ‘이용헌’등 주민플은 현장에 있어서 모두 증인틀입니다. 4. 1950년 12월31일 해보면 쌍구룡에서도 양민학살이 있었고, 1951년1월12일에 는 해보면 싱-곡리 모평 미-을에시 도 똥일한 학실-이 있었습니다.5중대 군인들이 불갑산 토변작전상 마을 주민을 소개 하여야 한다며 미·을을 비우라고 몇일전에 통보가 있었으나 8중대 군인룹은 이-직은 시간이 있으니 집에 있어 도 좋다는 이야기 를 하 므로 마을에 잔류하다가 70여명이 학살의 참변을 당했습니다 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