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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14장 힘평앙민학실 진싱조시 특열위원회 활둥 정동욱씨(작고)가 교편을 잡고 있는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나가보라고 하여 이 말을 따랐으나 학살을r 당하게 되었는데 이 일로 정동욱씨는 죽을 때끼-지 괴로워하였 다는것입니다. 5중대는 일차 학살을 자행한 후에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랑이니 ε말 리 일어나서 마을어l 풀을 끄러 가라고 하여 이를 믿고 일어선 사람을 모두 즉였다고 당시 현장에서 운이 좋게 살아 님·은 정달모씨 (65)는 증언하고 있는데 이는 적국의 국민에게도 할 수 없는 잔인한 행위입니다. 또한 5중대 군인들은 학살대상자를 따로 골라낸뒤 어린이와 노인들에게는 마을에 -불을 지료도록 하여 집뿐만 아니라 당시 집집마다 쌓아논 엿단을 모두 불태웠다는 것 입니다.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안 성일웅써는 당시 군인들이 다래기 (2항 7마을의 속영) 에 들어와서 학살을 한 것은 이틀전 동촌전투에서 패배한데다 미을 뒷산어l 봉화가 피워지니 다래기 사란들이 동촌전투에 가당했거나 빨치산을 도와 준것으로 오펀했 음이 분명하다고 증언하고 있어 당시 양민학살 행위가 5중대 군인들의 비이성적인 정신착란 상태에서 이루어졌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3. 다래기의 학살이 자행된 괴 같은 시기인 1 950년 10월 30일(음력)에 5중대병력의 일부가 외지마을을 점령하여 21 명의 목숭을 앗아갔는데 현장에서 l멍을 사실L하고 나머지 20영은 해보떤 공꽁묘지에서 학살읍 했숭니다. 당시 빨치산들은 국군의 통 행망히}를 위해 야간을 이용해 도로 곳곳을 파헤쳤는데 이같은 일을 외치마을 주민 들의 소행으로 간주해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당시의 생존자들은 증언하고 있습니 다. - - 불구자 흉내를 내 실아난 정기석씨 (66세)는 당시의 싱황을 다음과 같이 증엇하고 있습니다. 오전 10시에 군인뜰이 마을 사람듭을 모두 외치재로 모이게 한 후 느닷 없이 이계주(당시 사망)라는 사란을 두들겨 피!면서 도로플 파헤친 사람플을 대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급한 김에 관련이 전혀 없는 몇사람을 지목하였는데 그 사람들을 따로 모아 살해하였다는 것입니다. 4. 월악리사건이 있고나서 40여일후 해보면 %L곡리 모핑마을에서 또 한차례의 양민학 살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마을은 소개지역이어서 마을사람들이 집을 비우고 나왔으나 8중대로부터 들어 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귀가했는데 갑자기 5중대가 나타나 다시 동네를 비우라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겁애 질려 마을을 빠져 나오고 있는 중에 상구령재 왼쪽 산기늙 에 기관총을 설치한 5중대가 무차별적A로 총격을 가하여 마을사람들을 살해하여 - <1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