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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보도자료 1949년-2010년] .. -- . " - :-:: “ - “ - ~f- 8월 25일 1잃8년 창간호 음력 7월4일 톨, .'.: 톨 l 톨 _. 필자는지난 .73-74년 2년동 안 건국 직후의 여순(麗順)반 란사건(국군 14연대 반란사 건)해서부터 6 . 25공비토벌 에 þ1 루 71까지‘~“광주?‘전남지 역에서, 발쟁했던 : 동족상잔의 비극.을 취재, 신문에 . 연재한 바있다., 좌 ‘. 우익으로‘갈라진 첨예한 대립과 갈등 -속에 습 격 체포. 학찰의· 악순환은 우리겨레의← 현대사에서;동족 끼리 벌인 처참한 ‘광란의 실 육 바로 그것이라고 밖에 달 리표현할길이 없었다. 6 . 25당시 전남지역에서는 콕성 태안사 전투를 제외하고 는 큰 교전은 없었으나 적치 適治) 3개월 동안 수많은 우 익진영이 ‘반동’ 이란 이름으 로 희생당했고, 9 . 28 수복으 로 10월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려 n 칼 학 서「 대 -김 -조 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알려 진 함평 양민학살 사건이다 지 금까지 알려진 이 사건의 진상 은 50년 음력 10월27일과 28일 . 이툴동안 국군이 빨치ι 볕줄 색 출한다는 명분아래 당시 전투 지역내에 있었던 월야 · 해 보 ·‘.나산면 등 3개면 양민 5백 24명을 무차별 학살하고 1천4 백 54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15- 45세까지의 남자를 마을 앞 산으로 모이게 한 후 기관 총으로 무차별 사격했는가 하 면 마올을 포위한 후 주민들을 금가는 대규모 학살사건이면 서도 이 사건은 한때 역사의 그늘에가려졌다. 그런 까운데서도 비극은 계 속된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주민들에게는 빨갱이 가족 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신원 조회 때는‘. 어김없이 빨갱이 ’ 꼬리표가 따라 나왔으니 말이 다. 비로소 4 . 19 직후인 60년 5월 23일 구성된 국회 ‘양민학 설사건 진상특위가 거창 등지 와 함께 현지 조사한 결과 -피 해사실을 확인하고 국군의 행 위임이 확인됐으나 이듬해 5 . 16쿠테타가 발생해 후속 조치가 이휘지지 않았다. 지 난 93년 1월 ‘거창사건 등 관 련자의 명예회복에-관한 특별 조치법’ 아 제정됐지만 합평사 훈훈평 양민 학찰 50년 통한 피비린내 나는 만행을 저지르 고물러갔다. 그후우리 국군 이 진주해서는 죄익진영, 이 른바 ‘빨갱이’들에 대한보복 또한참극이었다. 공비토벌이 진행 중에는 지 리산을 비롯한 전남 도처의 산간지역에서는 낮에는 대한 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 할 정도로 밀고 당기는 ‘톱질 전투’ 가 숨가쁘게 전개됐다. 이로 인해 산간마을 양민들은 밤에는 빨치산과 내통하는 ‘빨갱이’ 로 낙인찍혀 희생당 하는일이 다반사였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국군 마을 앞 논S로 끌어내 총으로 난사했다는 것이다. 학살당한 어머니 등에서 죽어간 어린아 이, 한 가족 7명이 몰살당하고 대가 끊겼다는 등 학살의 아비 규환은 지금도 생생히 ‘합펑 천지’를떠돌고있다. 희생자 유족들은 국군이 학 살 전날, 해보면문장리 소재 국군5사단 20연대 5중대 중대 본부가빨치산들의 기습을받 아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자 빨치산과 주민들이 내통해 기 습을 당했다고 판단해 이같은 일을 벌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거창양민학살사건에 버 건은 적용되지.‘않아 억울하게 죽은 원흔들은 아직 구천을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희 생자 유족들의, 청원에; 따라 국민회의가 、이· 사건의 .진상조 사를 싫시키로 했다뎌 뒤늦게 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제와 서 당시의 만행자를 처벌하자 는 것이 아니다철저한 진상 조사를 통해 억울하게 숨진 피해자의 명예회복조치가 이 뤄지고 유족들을위로하는 동 시에 국가에서 조그마한 위령 탑이라도 세워주는 것이 도리 라고생각한다. /무등일보논설위원/ η / ] 7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