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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 년] 80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심포지움 노획물로 압수해갔다는 것이다. 월야리 현장에서 등에 기판총탄을 맞고도 죽은 듯이 쌓여진 시체밑에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다는 정(鄭南植)=33씨와 당시 총살하 는 엄무를 맡은 모소대장 연락병 『김일호.lI 1등병 때문에 학살자중에 제외되었다 는 정(鄭一雄=32)씨 증언에 의하면 동 부락 우익진영의 청년들은 5중대가 들어오 기 전 해보면(海保面)에 주둔한 5중대를 찾아 『현재 남아 있는 부락민들은 부역 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해주려 떠나려던 때에 군인틀이 들어 왔기 때문에 전 부락민틀은 이들 군인들에 환호의 박수를 보내며 열광적인 환영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살려준다고 마을 뒷산에 모이라 해놓고 그곳에서 남녀 구별없 이 군경가족과 50세 이상의 고령자 및 16세 이하의 어린애틀을 구분 제외하고 나머지 부락민들엔 앉으라고 말한 다음 담배한대씩올 피우게 했다. 그리고 오중대장 『권』대위의 권총 선호로 미리 준비해 두었던 기관총과 줄지어 있었던 총살분대의 M1소총을 면전에서 수백발 싹 죽였는데 1차 사격에서 숨이 붙어 았던 부락민들은 『산사람은 일어나서 각자 집에 붙은 불을 꺼라 그래야 살 려준다』는 『권』대위 말에 속아 일어났다가 2차 사격에 대부분 죽고 3차 사격은 시체를 총뿌리로 헤치며 움직이는 시체에 총탄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거창 함양 산청의 학살과 같이 시체를 태우지 는 않고 그대로 방 치한 체 물러갔다 한다. 이 학살에서 제외되었던 부락민들에겐 각자 자기 집에 불을 지르게 한 후 10 리 떨어진 면사무소 소재지에 피난 시켰다. 처녀와 유부녀를 강간한 후 싹 죽이고 부락민들의 재산을· 약탈해간 f5중대』 였기에 현재 이곳의 우는 어린애를 달래려면 i'5중대』란 말 한마디만 하면 울던 어린애도 울음을 그치고 무서워한다고 하며 젖올 먹이다가 어머니란 단어(單語) 보다 ff'5중대』란 단어를 먼저 배운다고 했다‘ 91년도에 정부에서 지어준 후생주택 10여 동이 세워진 월악랴 부락엔 아직도 주춧돌이 수없이 남아 있고 형장이었던 마을 뒷산에는 절손되어 유가족이 없는 농민의 무텀이 남아 있는 부락민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20여개 있었다 아비규환의 10년전의 악몽이 되살아 폼서리가 쳐진다는 유가족들은 r권』 대 위의 극형을 정부에 전정할 것아라 했다. 만일 아를 들어주지 않으면 전부락민들 이 총출동하여 전국을 샅샅이 뒤져 『권』대위는 물론, 그 가족까지 찾아내어 몰살 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I威平都 月也面얘서 光州支훌t 李相文 記I <나 산 면 > <해 보 면> 83년 음력 12월 5일부터 부락단위로 감행되었던 함평군 해보면(成平웹 海保 !데)의 4백병파 나산면(羅 !!r面)의 3백명 학살 때도 역시 제5사단 20연대 3대대 5 증대 장 권(處俊 i、:)대위가 치휘하는 군인야었다. 아 양변에서 는 동일한 방법 으로 - 5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