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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 년] 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군 제1 1사단의 5중대 병력이 불갑산 일대의 공비 토벌부대로 파견되고, 피아간에 끊임없이 소규모 전투를 별이게 되었 다. 낮이면 대한민국, 밤이면 인민공화국으로 전세가 뒤바뀌는 가운 데 무고한 양민들만 ‘반동분자 와 통비분자 로 몰려 학살되었다. 인민군들은 주로 경찰 · 군인가족 · 지주계급 인사들을 학살했고, 국군은 ‘산에 있는사람들과내통했을가능성이 높다’는이유로무산 자 계층을 학살하는ι 보복과 재보복이 되풀이되었다. 이런 관계로 5중대의 본격적인 학살이 자행될 때는 좌익에 관계한 사람은 불갑산으로 들어가거나 외지로 도피하고, 우익성향의 주민들 은 광주나 함평읍 등으로 피산하여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그야 말로 그 충돌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순수한 양민들이 었다 그런데도 군인들은 동촌마을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다 음날인 12월 7일 오전 8시경에는 월야면 월악리 내동 못갓 순촌 - 송계 f 동산 괴정 등 6개 마을을 기습뼈 학살했다 01 뺑들은 본 래 정鄭씨들의 집성촌으로 400여 호가 넘는 큰 촌락이었다. 군인들은 주민 l천여 명을 송계마을 ‘남산봐’ 라는 분지애 몰아넣 고 마을에 볼을 지른 다음 청장년들만 골라냈다 젊은이들만 뽑아낸 군얀들은 권준옥 대위의 지시에 따라 3정의 기관총으로 일제히 사격 을 가해 살해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학살참변이었다. 이때 사살된 숫자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학살 현장에서 총 을맞지 않고살아난사람이 3-----4명 있지만 이들은하나같이 극도의 공포감 때문인지 당시의 숫자에 대해 엇갈린 증언을 하고 있다 유족 들은 250벙 011서 300명 또는 3딩0명으로 각기 주장을 달리하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보아최소한 200명은념을것으로추정된다 ‘남산외’ 학살로 이 일대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큰 마을이 절반으 130 ! 해빙 후 양민학살사 - 5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