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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년] 경남 · 전라지역 보도연맹원 - 양민학살의 현장 49 허탈해진 군인들이 부아가 치민 나머지 다음날 새벽 마을을 습격했 다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생존 주민들은 증언하였다. ‘함평양민학살사건’ 의 연출을 맏은 이는 권모 대위로 그의 잔인 성은 이 지역 사람이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한다. 그에게는 어른도 아이도 없었다. 윌야면 월악라 남산되 학살사건에서 한 사 병의 도움으로 살아난 정기찬 씨 (57세, 월악랴 1구 827)는 딸을 살 리려는 한 아버지의 애끓는 호소도 외면한 채 나이 많은 노인을 총 을 쏘아 죽여 버리던 권모 대위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남 산외에서는 이외에도 철없는 12~ 13세 가량의 어린아이들을 끌어 내어 마을로 내려가 집집마다 볼을 지르라고 시켜 그나마 살아남은 주민들도 양식과 거처할 움막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후 5중대는 1951년 2월 20일(음력 정월 대보름) 해발 516m의 험악한 산세의 ‘불갑산 공-비 대토벌작전 에 투입 사단병력과 함께 ‘대보름작전’ 을 펼쳤다. 결국 이 대토벌작전으로 불갑산은 피로 얼 룩졌고 억지 로 끌려 간 주민들의 상당수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생 존주민들은 작전 당시 개울은 온통 피로 물들었고 흰 명주옷을 엽 은 시체가 온 산을 뒤덮었다고 증언하여 사망자의 수조차 가늠카 힘들었다. 잠자다가 당한 마을 1950년 5월 ‘안천상륙작전’ 쇠 감행으로 9월 28일 서울수복 약후 계속 북진을 거듭하던 국군과 연합군은 압록강에서 중공군의 개입 으로 또다시 전세가 역전 1951년 1월 4일 후퇴를 하기에 이르렀 다. 이 럴 즈음 경 남 · 전남 · 전북도 등 3개 도 5개 군에 걸쳐 있는 지리산 자락에서는 육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의 ‘견벽청야 (堅뿔淸野)’작전에 의해 어린아이, 부녀자, 노약자에서 심지어 임산 부까지 수백여 명이 집단학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51년 2월 8일(음력 정월 초아틀) , 전쟁중 처음으로 맞아한 음 - 5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