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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년] 48 6.25를 다시 생각한다 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앞서 목이 잘려 죽은 주민들의 피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김씨는 절반 가까이 잘린 목덜미를 치료하 느라 1년여를 고통에 시달렸고 치아가 다 빠져 버려 틀니를 해넣었 다. 김씨는 그때의 후유증으로 인해 지금껏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고통과 한에 찬 세월을 살아가고 았다.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거에 국군들에게 그토록 혹독한 벌을 받아야 했는지 알 수 없다면서 진상을 밝혀 줄 것을 호소하였다. 불갑산의 증언 남원에서 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난 지 꼭 19일째인 12월 6일, 전 남 합평에서 월야면 정산리 동촌마을을 시작으로 1951년 1월 12일 까지 4회에 걸쳐 3개 면 9개 마을의 양민 5백여 명이 토벌대의 습 격으로 집단학살당했다. 토별대는 육군 제×사단 × 연대 × 대대 5 중대로 이들 부대가 이곳에서 양민들을 집단학살하게 된 이유를 지 역주민들은 세 가지를 들어 증언하고 있다. @ 야 부대 병력은 대부분 제주도 병력으로 이루어졌으며 남원 양민학잘과 같이 수복작전을 빌미로 감행되었다. ‘4.3제주민중항 쟁’으로 인해 수많은 제주도민들아 목숨을 앓는 사태가 발생, 군에 입대한 장병들이 고향을 찾아갔을 때 자신들의 부모형제가 그 사건 으로 목숨을 잃은 것을 알자 복수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군에 복귀 하여 ‘양민학살’ 에 주도적 역 할을 했다는 것 . @ 12월 5일 5중대 병력이 함평군 해보면 금되리에 주둔하고 있 다가 장성군 삼서면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순찰하던 중 함평군 윌야 면 정산리 동촌마을 입구에서 공비의 습격을 받아 군인 3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한 사건에 대한 보복행위라는 것 . @ 이날 밤 국군토벌대의 토벌작전이 두려워진 지방빨치산들이 동촌마을 뒷산에서 돼지를 잡아놓고 주민들을 억지로 동원, 산꼭대 기에 볼을 피워놓고 정과 팽과리를 치며 약을 올라자 동료를 잃고 - 5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