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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 년] .h싸 、!ι양민 학 삼사건 손가락은 오그라들어 끌어 올릴 때마다 우물 바닥 가장자리 에 붙어 있는 흙을 양쪽 손에 한줌씩 권 채 끌려 올려졌다. 통곡 소리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다. 온통 울음바다였다. 집들은 불타고 양식마저 불 태워버린 5중대를 원망하며 하 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까슴속의 한과 서러움을 씹어 삼 키며 얼어붙은 땅바닥에 가족무덤들을 만들기 위해 타다남은 나무둥치로 땅을 놨다. 이들을 살해한 5중대는 다시 이틀 뒤 옆마을 후平부락을 습격, 2백여명의 양먼을 학살 했다. 군안들에 의해 두번 세 번씩의 죽음을 당한 城大마을 양민들 그리고 그들의 유가족 들은 우리네의 관습대로 음력 섣달초이튿날 마을 집집마다 제사를 지낸다. 지금은 많은 주민들이 그 지긋지긋한 한의 고향을 떠나버 렸지만 어느 곳에 가든 이날은 제사를 지내며 죽은 자의 한 을 달래주고 또 달래고 있다. 대보릎작전 51년1월10일 城大마을의 어린이 노약자를 가라지 않고 60 여명 의 양민들에게 기 관총으로 무차별 난사한 뒤 우물속에 수장시켜 두차례의 확인사살까지 감행한 5중대는 이들 후인 끓월뿔조만율곽폴표싫핀정도 떨어갚후잘런~쫓검E많흩[_판 오느짧현멸효활잘한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후平마을은 波平 尹씨 1백 70여가구 9백여명이 모여 살고 있던 威平군내 가장 부유한 촌락이 었다. 佛甲山과 인접해 있던 光岩 大角 山內리 주민들이 5중대에 의해 추平마을로 소개해 았던터라 이웃마을 주민들이 더 많 석;:, m [ h 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