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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년I 톨威平·양민학싼사건 국군 공비토벌대는 진정 양민학살을 목적으로 만들어 졌 는가. 이 부대는 이후 慶南 山淸 威陽 居昌에서 또다시 양민 학살을 감행했다. 威平양민들 역시 智異山변과 다를바 없이 낮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란 하루 두얼굴의 이념과 사상에 접하여 살아 남아야만 했다. 威平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이 지역 주민들은 3가 지로 나누어 증언하고 있다. 첫째는 토벌대 병력이 대부분 濟↑l、l도 병력으로 이루어 졌 다고 한다 r南原양먼학살」도 이꽉 유사하가도 하지만 수복 작전을 빌미로 학살을 감행했다는게 成平양민학살과는 다소 다른 접야다. 왜 灣州병 력 이 학살사건을 주도했는가. 그것은 r 4 .3 제 주폭동사건」으로 이어진다. 좌익과 군내부의 반란으로 이어 잔 「제주폭동사건」은 수많은 、濟州도민이 목숨을 잃는 사태에 이르렀다. 濟州도에서 입 대 한 군인들아 휴가를 받아 고향에 돌아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부모형제가 폭동사건으로 얀해 목숨을 잃은 것을 안 나머지 군에 복귀 「양민학살」의 주도적인 역 할을 했다고 학살현장의 생존자와 지 역주민들은 주장하고 있다. 둘째는 50년12월5일 5중대 병 력 이 海保면 琴德리 에 주둔 하고 있다가 長城군 森西면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랴 순찰 중이었다. 月也면 휴山리 東村마을 업구에 이르렀을 때 공비 의 습격을 받아 군인 3명이 그자리에서 사망한 보복행위란 것이다. 셋째는 이날밤 東村마을 뒷산에서 지방빨치산들이 국군의 계속되는 북진때문에 자산들의 신변에 위힘을 느껴 돼지를 - 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