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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 년] 이루어 능선의 후미진 곳이나 물줄기를 따라 골짜기의 바위틈에 옹기종 기 모여앉아 열매나 나무뿌리로 연명하는 비참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5중대의 양민학살극이 극에 달할 무렵 국군 채11사단은 ‘불갑산 공비토별 작전’을 구상한다. 이른바 ‘대보름작전’으로 불려진 이 토별작전은 1951년 음 력 정월 대보름날을 기해 대규모 병력을 불갑산에 투입해 입산자들을 완전 히 쓸어버라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불갑산에 은거한 사람들은 국군이 언젠가 진격해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대보름작전’을 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 선은 중부지방에서 교착상태에 들어갔괴 사방이 국군에 포위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 많은 입산자들을 데라고 달리 근거지를 바꿀 수도 없는 일이었 다. 작전 개시일인 1951년 2월 20일. 동이 틀 무렵 국군은 7개 방면에서 불갑 산을 완전히 포위한 채 진격해 들어갔다. 겨울이었던데다 오랜 가뭄으로 바 짝 마른 불갑산은 군인들이 불을 지근자 수석?l어1 환환 타옥라갔다. 그뒤를 따라 국군은 일제히 사격을 하며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갔다. 산비탈에 수많 은 흰옷 입은 사람들이 우왕좌왕 헤매고 있었다. 무참한 살육이 벌어졌다. “그때 불갑산은 하나의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 들이 들어와 있었지요 겨울이 되니까 2D연대가 합동으로 패보름작전’을 편 다는 소문이 나돌았어요 함평군 당간부들은 대보름까지는 보급나간 사람 들도 다 들어오라고 그랬어요‘ 나는 정월 열나흔 날 보급나왔다자 군인들이 불갑산 사방을 포위해버리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그때 보니까 새까 닿게 군인들이 몰려 불갑산으로 진격해 들어가는데 불길이 천지를 가리고 총소리가 진동을 했어요 산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아 확 희생된 것이지 。” 162 - 4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