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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 년] 특히 월야면 예덕랴 예동마을에는 지주가 많아 주민들의 성향이 대개 우 익 적이었는데, 따라서 산사람들이 밤에 내려와도 식량을 주지 않자 몇몇 지 주들이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주들아 이에 대한 보 복으로 동네에 있는, 땅을 적게 가진 사람에게 ‘산사람과 내통했을 가능성 이 높다’고 하면서 이들을 다시 학살했다. 이렇게 해서 보복과 재보복이 되 풀이되는 바람에 이 동네서만 fÐ여 명이 희생당했다. 이 때문에 좌익활동을 한 사람은 불갑산으로 들어가버렸고 우익성향의 주민들은 굉주나 함평읍 또는 면소재지로 피신해 나가버렸다. 따라서 마을 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그 충돌의 와중에 아무런 영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양민들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z)분 만에 마을 하나가 사라지다 1950년 12월 6일(음력 10월 zl일) 새벽. 전눈깨비가 흩날라고 있었다. 어렴풋 이 동이 터올 무렵 일단의 군인들이 기관총과 소총을 갈겨대며 함평군 월 야면 정산리 동촌부락 입구 진다리마을에 들어섰다. 누가 알았으랴. 이날의 총성이 함평의 양민을 집달학잔하러 나서 11사단 2β연대 2대대 5죽대(중대 장 권준옥 대위)의 신호탄이었음을. 그들은 마을을 애워싼 채 예광탄으로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끌 어냈다. 말할 틈도 없었다. 잠결에 갑자가 끌려나온 30여 명의 남녀노소 주 펀들은 동데 앞 논바닥에 대동E갱이쳐쳤다. 동녁1는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초겨울인데다 자붕야 바짝 말라 있을 때라 지 붕들은 불이 붙기가 무접게 활활 타오르며 인근 지붕으로 번져나갔다. 영 문모를 재난에 몸서라치고 있던 주민들 앞으로 장교 한 명이 나섰다~ 5중대 장 권준옥 대위였다. 그는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부하에 게 무아라고 소리치는가 싶더니 논바닥 주위에 설치된 기관총이 요란하게 불을 뿜기 시작했다. 함평 147 얀 A 4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