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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한 병력으로 서부전션을 공격해 옴으로써 방어선은 붕괴되었다. 맥아더는 현지 사령관들과 작전회의 끝에 11월 28일에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 에 직면해 있다 는 특별성명을 유엔에 보냈다. 즉, 20만 명이 념는중공군이 유엔군을 향해 배치 된 사설이 명백해졌다는 것이다. 이는 그간 맥아더가중공의 의도를 잘못 판단하 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 공식적으로 안정한 것이다. 유엔군의 총공격은 오직 4일 만에 그쳤으며, 이른바 ‘12월 후퇴’ 가 이루어졌다. 중공군의 진격 앞에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고, 12월에는 평양이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원산 · 흥남선에서, 서부전션의 미 제8군의 후퇴는 30도선 근처에 서 머물렀다. 이제 압록강 진격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안전하게 후퇴하느냐가 문제였다. 혹한과 고전 속에서 해공로를 통하여 홍남 철수는 바다를 통해 12월 24일에 작전을완료하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이 되고 장기화할 조짐이 나타났다. 중공군의 원조에 힘입은 북한군은 12월 2D일에는 다시 %선을 념어 남진하였다. 맥아더는 미국에 지상 증원군을 요청하고 새로운 정치적 결정과 전략계획을 제시하였다. 드디어 12월 8일에 발표된 트루만랩敵껴 Atlee,C.R)의 성명은 한반도에서 유엔 의 목적을 평화적으로 달성하지 위해 모든 노력을 가울어야 한다는 내용석었다. 이는그단계에서 미국의 한국에대한정책이 근본적으로약화된 것을의미하는 것이었다. 공산군은 1951년 1월 4일에는다시 수도서울을점령하기에 이르렀고‘ 한국 정부와 많은 민간인은 다시 남하 피난길에 올랐으며, 이것이 이른바 ‘1 후 닫 아단.J갯0년 l_Z월 16일에 트룬만이 국가 긴급사돼를선언하였으나 전황때눈 별로 영힘t을주지 못하였고, 질서 있는 철퇴작전이 주안이었다. 중공군의 개입 이래 공산군의 남진은 계속되었고 그들의 보급로도 늘었으나 유엔군의 공중 공격으로 저지되었다. 1951년 1월 25일부터 유엔군은 반격을 재 개하며 전진을 계속하였다 2월 10일에는 인천과 김포를 탈환하였고, 3월 14일에 는 서울을 재탈환하였으며, 3월 24일에는 %선을 다시 돌파하였다. 이 와중에 마 합동참모본부는 1951년 2월 21일에는 나진에 대한 폭격금지를 명하고, 3월 1일에 는 다시 압록강 연안의 중국의 발전시설에 대한 폭격도 금함으로써 현지 사령관 1ω ! P-t.댐 암정군앙토문외연구외 - 421 - -‘i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