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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보도 자료 1993년-2009년] - 월야면 외치리 외치마을 주민 18명을 학살. 세대별로 장남 22명을 선별한 후 1명은 주민들 앞에서 사살하고 2명은 산 위의 초소로 장작을 운반케 하여 살 았고.2명은 연락병과 도로에서 자주 마주쳐 안면이 있어 살려주고 17명은 해보면 두리샘 뒷산에서 사살함. - 나산면 이문리 사정마을 주민 10명 학살합(귀가하는 중학교 학생 포함) . • 1950. 12. 31(4차 집단학살〉 -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 주민들에게 설R지로 피난토록 지시한 후 피난대열 에 총을 난사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살하여 60여 명이 학살됨 . • 1951. 1. 12(5차 집단학살〉 - 해보면 상곡리 쌍구룡에서 펴난중인 대창리 주민에게 무차별 총을 쏘아 70여 명을 학살하고 증거를 없애가 위해 들샘에 시체를 수장함. • 1951. 1. 14(6차 집단학살〉 - 나산면 우치리 소재마을에서는 미처 피신을 못하고 집에 있는 노약자를 마을 앞 논으로 집결시켜 36명을 학살하고 가옥 5동을 소실함. • 1950. 11. 27(7차 학살〉 - 월야면 월야라 전하마을 거주 정창기(광주세무서 근무)외 3명이 광주로 피난 가는 도중 월야리 가마소(광대마실)에서 5중대 군인이 학살한 후 소지품을 검사하며 현직 세무서직원 신분을 보고 아까운 인물이라며 가족에게 수습토 록연락. • 1950. 11. 27(8차 학살〉 - 광주시 광산구 덕렴동 거주 유태열등 8명이 월야면 경계에 있는 주막에 모여 있는데 외치제 도로변으로 이동시켜 학살함. • 1951년부터 1960년 - 유족들이 탄원과 진정서를 제출하며 억울한 죽음을 각계 요로에 호소. 관련 유촉들 관계기관에서 수배 및 구금조치 • 1960. 5. 18(김의태의원 발의〉 - 제4대국회 제35차암사회 19차본회의에 국회차원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 특 별위원회 구성 발의. • 4293(1960).5.20.5. 21(한국일보에 특집보도〉 - 광주 주재 ’이상문’ 기자가 현지에서 취재하여 2회 특집보도 - ‘전남 함평서도 양민천여’ , ‘나는 시체더미서 살아났다’ • 1960. 5. 23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 특별위원회구성〉 - 국회 제35회 임시회 제 19차회의에서 구성 ;전국3개반(위원장, 崔 天의원) 146 내일을 할허 달벼가는 상팔입 모습들 m ι Q 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