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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복사기 등 사무집기를 지원하여 유족회 활동을 원활히 하였으며 단기낌93년 5월 20일재마구 터지는 대학살비사, 전남 함평서도 양민 천여명)와 1960년 5 월 21일^}(나는 시체더미서 살아 나왔다. 함명학잘사건 생존자의 말) 호F국일보 (광주 이상문기자)의 양민학살 현지확인 보도자료를 발굴하였다. 학살당시 동삼면 선무공작대장인 윤인식(서울거주 : 7, 8, 9, 10대 국회의원 ;99년 사망)의 학살사실 자펼확인서를 확보하였고 학살 당시 월야지서장의 직책에 근무한 이계필(서울거주 : 2CXXJ년 사망마 순경 오정인(함평읍 거주)의 학살사실 확인서를 자필로 받아서 명예회복에 일익을 하게 되었다. 남산외 학살현장에서 생존한 정남쉰손불면 석창리 농암거주)과 양채뭔월야 면 전하 거주)의 생생한 증언서도 받아 명예회복을 위한 증거를 확보했다. 마.유족회 차원 학살을 당한 이듬해부터 유촉들은 억울한 죽음을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관 주동자 고초 계기관의 억압으로 오히려 공비가족으로 몰려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5. 16쿠데타에 의하여 군사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주동자들이 잡혀가 고초를 겪자 유족들은 구심점을 잃게 되어 유족회가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1993년 유족회를 다시 구성하고 학살장소를 순회하며 위령제를 봉행하다 6 회째인 1998년부터는 처음 학살이 시작된 12월 6일을 합통위령저l날로 전하고 매년 희생자들의 명복을 벌고 있으며 2003년도에 11회째 봉행하고 있다. 명예회복 청원서를 14대 국회{94. 11. 7 국회접수353호), 15대 국회(96. 9. 6 국회접수1055호), 16대 국회(2αX). 7. 3 국회접수10호. 행자위3호)에 제출하였 다 학살 50주기를 (2CXX)년) 기념하며 한새들에서 전사한 5중대 군인 2명의 전 전사비 제막 사비를 전사자 송기봉 기족이(형 송소수와 부인) 참석한 가운데 정산리 내정마 을 앞 24호 국도변에 전사비를 제막하였다. 민변소속 변호사들의(조용환 등 15인 변호사) 도움을 받아 국회의장을 상대 로 헌법재판소에 ‘밥위 확인’ 헌법소원을(200)헌마508호:20c0. 8. 3) 제출하 여 03. 5. 15 각하됐다. 또 유족회의 활발한 활동을 위하여 전남도지사의 승인 을 받아 「사단법인함평사건희생자유족회」로 1998년 9월 21일 등기하였다. 그리고 함평군수로부터 위령제 비용일부를 1996년부터 지원받고 있으며, 함 함항j힘펑군항토문화연구호11225 n 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