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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5. 집단학살개요 함평%맨l학살은 1950년 12월 6일(음 10. 27) 이른 아침시간에 월야면 정산 리 장과} 동촌마을에서 집에 있는 사람들을 도로변과 논으로 모이게 한 후 50여명을 학λ갈하였으며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을 구분하지 않았고 군인가족도 학살을 당하였다. 특히 학살 현장에서 총을 맞고 생존한 어머나는 왼손이 불 구가 되었으며 그때 큰아들 안종택당시 왜)은 죽었고 짧인 이들 안종필은 엉덩이의 흉터 때문에 지금까지 공증턱욕탕을 한번도 가지 않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가옥도 250여동 불을 질렀고 탈콕하지 않은 벗더미도 함께 타 버려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이어서 장성읍 방면으로 진격하자 인근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달아났으며 계림리 죽림마을 뒤에서 붙잡은 주민을 또 20여명 학살하므로 당일에 70여명 을학살하였다. 면소재지로 1950년 12월 7일(음 10. 28)에는 해발 1닮n의 월악산 자빽l 자리한 7개마 피나토로 」지자 을{지변, 내동, 성주, 동산, 괴정, 송계, 순촌)도 5중대장 魔췄玉대위의 인솔하 에 미명 시간대에 마을을 포위한 후 전 주민을 팔열부정각 앞 광장으로 집결 시킨 뒤 남산팩로 꿀고가서 남녀 구분없01 1엠l부터 쐐 l 싸l에 해당되는 사 람을 별도로 분류시켜 200여명을 학살하면서 3번이나 생존자를 색출하였고 확인사살까지 하였다. 15세 미만의 아이들은 집에 가서 불을 지르도록 지시하 여 1,COO여채의 가옥이 소실 · 전파퇴었고 45세 이상의 사람들은 간단한 이불 도구와 식량을 가지고 면소재지로 피난토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사항은 당시 5중대장 연락병으로 학살현장에 참여한 김일호와 소총 못 」 ·J , 으 E 가」 까껴 O 펌 두리생 뒷산에서 λ}살 수로 참여한 생존 군인(현재 제주도에 거주), 그리고 선무공작 대장으로 학살 현장에서 연설을 한 전국회의원과 당시 월야지서장, 월야지서 순경의 증언서 들은 확실한 양민학살의 증거들이다. 물론 유족측의 증언과 학살현장의 생존 자 증언서도 입증의 자료로 충분하다. 또 12월 9일 월야면 외치리 외치마을에서 가정별로 장자만 22명 뽑아 전 주 민이 보는 앞에서 1명을 사살하고 2명은 외치재 산 위로 정작을 운반토록 보 내서 살았고, 연락병과 지주 마주쳐서 안면이 있는 2명은 살려주고 17명은 해 보면 두라샘 뒷산에서 사살하였다. - 3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