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page

[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악영높은즌 3섣다i 5중터 증대돈부 자리 •. 4()(겨년히 효론 지금 온 고룻액획정으북 연해있디. 옥씨(65)의 체험담이다. 다래기 학살은 이렇게 시작 됐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가 방위 빵으르서 낙 오자임을설명했는데도충격을가했다는사실. 그는 총을 맞은 뒤 비틀거리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적댔 →-죄만 군은:아랑곳→하꾀 않고 문세발받 총:올 더 왔다는 것이다. X 그라고늠 곧바로 학살이 시작됐다. 모두 ‘뒤로 돌 아’를시켜놓고가족들이보고있는가운데 기관총올 들이갈겼다. 다래기 사랍들이 뛰어 놀던 남산은 순 식간에 부상자틀의 신음소리와 가족들의 울부짖음으 로 아비규환이 되고말았다. ·대한민국 만세’부른 방위병에도 충격 ‘총소리가 딱 그치더니 일어나라고 합니다. 지균 일L아있는사람들은운이좋은사람아니 빨리 일어나 n}을에 불올 끄러 가라고 소리 지르대요. 나는 송장 에 p.l여 꿈쩍도 옷했는데 그 말을 믿고 일어섰던 사 탐뜰은 모두가 죽었어요. 그들은 두차례 사살플 실 - 347 - 시한 뒤에도 또 한번 불을 끄러 가라고 했지만 나는 정신올 놔버려 그 뒤 상황은 지억이 나지 않습니다- 역시 학살의 현장에서 운이 좋게 삼아 낚은 정딪 모씨 (65)의 얘기다. 당사 구사일생으료 살아난 사랑 가운데 생존자는 정달모써 이외에도 정연옥·정일웅 써와맥동댁이라불리는힐머나둥모두 4명. 이뜰의 중언은 모두가 일치한다. 학살이 끝난 뒤 그 현장을 둠러 본 사랍틀은 차마 말로는 다할 수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창자가 비 집 고 나온 사랍은 부지기수였고 얼굴 한쪽이 떨어져 나가 도무지 누군지를 알 수 없어 가족들이 애를 먹 기도.혔다. ' 때문얘 여때죽앞올 당한샤람들음파혀f--­ 를 라 찾지 못하고 장례를 지낸 사랍도 많다. 당시 사망자 중에는 한 집에서 7명 이 볼살올 당한 경우도있고외아들:oJ 죽어 대가끊긴 집안도 많다. 정홍규써(58.예비역 대령)네 집은 정씨의 세 작은아 버지와 임신 7개월의 숙모, 그리고 집에서 일하던 아저써 두 분 둥 한집에서 한꺼번에 7명이 생명올 잃 었다. 또 중조할아버지 제사툴 지내려고 친정에 왔 다가 변올 당한 사탑; 마혼이 넘었는데도 젊게 보인 다는 이유로 죽엄올 당한 사람 퉁 억울한 사연은 끝 없이 이어진다. 정일웅써의 증언올들어보자. ‘당시 군인들이 다래기에 들어와서 학살을 한 것은 이틀전 명촌천투에서 패배한데다 마올 뒷산어l 봉화 가 피워지니 다래기 사랍들이 명촌전투에 자담했거 나 빨치산올 도와 준 것으로 오판했음이 분영합니 다- 정씨는 당시 사망자들은 순수한 양민일 뿐 빨치산 은커녕 부역자도 한영 없었다고술회한다. 그는그 중거로 아궁이에 숨어 있던 아틀(국민학교 교사)올 억지로 내보내 죽게했던 정동욱씨(작고)를 예로 든 다‘ 정씨는 교편 잡는 사랍이 무슨 죄가 있냐며 아틀 올 꾸중해서 내보냈다가 둘째 아들 방성을 잃고 말 았다. 정써는그후아들을자신이 죽게 했다는 죄잭 감으로 평생을 괴로워 하다가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정써는 5중대 군인들이 학살 대상자플 따로 끓라낸 뒤 어린이와 노인들에게는 마올에 볼:플?--"^l르도복 했 다고 말한다. ‘빨치산들이 뜰어오니 :..r뜰이 말플 붙이 지 봇하노 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당시는 나락을 거둬 tJ} 당어l 벗단을 쌓아 두었는데 모두가 불타고 말았어 요. 특히 지변·내동마을은고래등 깐은-기와집듀이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