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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 ’ l 、 . 울분올 삭이지 못하연서도 ‘어쩔 수 없는 민족사의 센극.으로 단념하고 지금껏 삼아가고 있는 것이다. 합평사건 가운데 최대의 회생자룹 낸 월악리 지변 · 내동!l}을의 이야기는 차마 눈움 없이는 플볼 수 없 다. 당시 1S세 미만의 소년이어서 쭉유블 피했던 사 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마올은 얼른 보아서는 전 쟁의 상혼이 느껴지지 않는 평화스런 모습이다. 그 러나 사립올 열고 들어서연 모두가 학살사건의 피해 자로서 지난4D년동안말못할슬픔을안고 살아가고 있음을알수있다. 뱃속의 어린아이를포함일가족7명이 몰살을 당한 한이 배 있고 증조할아버지 째사를 지내려 왔다가 이유 없는 죽음올 당했다는 꽃다운 산부의 。H 절한 사연도가승올때린다. 마올 충간 중간에 비어 있는 빈 집터도 그날의 상 혼을 그대로 말해주고 지금은 양계장으로 변한 남산 외 봉우라 학살의 현장도 그날의 딱옹올 되살려 주 기에 충분하다. 국군들이 동촌·장교마올에 입성해 보복살인C?)올 강행하던 날-빨치산들온 외곽으로 피했다가 밤이 되 자 마올 뒷산 곳곳에 봉화를 올린다. 음력 10월 27일 처녁 월악랴 뒤혜 았는월약한R도봉화가 피워졌다. 빨치산들은 。l 붕화가숭전올알려는 행위였지만 이 것이 I백2/)여명이 집단학살올당하는 계기가 될 줄 이야. 당시 냥살희(남산)에는다해기로불리는 지변·내 동·순촌·송계·괴정·성주·동산마을 등 7개 동네 남 녀노소들이 모두 모였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 만 7백여명은 넙올 것이란 것이 생존자들의 주장이 다. 지금은 마올 이릅올 따로 부르고 있지 만 당시논 이들 마올 모두가 다래기로 통했고 평야지 대에 있어 상당히 부촌이었던 것으로알려진다. 바로 이 마을이 지방문화재로지정된 8염환째각이 있는 곳. ‘새참 때나 되었는데 군인들이 들어와 모두 남산 으로 모이라는 거예요. 당시- 청년플은 국꾼이 수복 했다는 소식올 듣고 태극기를 플고 환영올 나가려 하던 완강어서 아무런 의심없이 모두가 딴갔지요. 동네 사랍뜰이 모두 모이자 15~40세까지워 사람틀 (냥녀)올 따로 모으더니 군경가족이 있으면 나오라 고 하데요. 방위군소대장이던 정병오씨(당시 25세 정도)가 일어나서 뭐라고 얘기했으나 그 자리에서 총플씌버렸어요- 송장더마에 깔려 있다 기작적으로 살아낚은 정연 관총을 장착하고 무차별 사격올 가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집과 벗가리 모두 불질러. 벼렸다. 그래도 동촌마을에선 젊은 남자들만을 골라 살해 했으나 이웃 마을인 장교랴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려 지 않고 사격을 가해 20여명이 죽었다. 장교라 입구 비석에는 지픔도 총탄이 비켜.나간 흔적이 역력히 남 아. 있다. 이날 강영주 할머니(71)는 당시 5중대가 어린아이를 업고 가는 부녀자에도 총올 왔다고 중언 한다. 강써는 그날 다섯살 난 아이를 잃고 자신과 둥 에 업힌 애는 총장올 입는 피해를 당했다. ‘상황이 아무리 급박해도 군경가족은 구멸을 했는 데 당시 국군은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동촌마을어l 사는 곽상태써(문장 신협 상무)휘 얘 / 1 앗E년 6월때 얼린 국회 및 도의회 속기혹율 모연 .앙민회 상시건 ·에 대한, 논의 내용이 군대군데 눈에 띈다. 기다. 당시 군경가족은 군애 의해 보호 됐는데 형이 전쟁에 나가 전사한y군인가족이라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날 부친올 살해해 버렸다는 것; 곽씨는 수복 전에는 인민군에 괴롭힘올 당하고 수북 후에는 국군 에 의해 부모를 잃어버련 현대사의 비극올 안고 있 다. 물론 이같은 경우가 비단곽씨데 가족만의 얘기는 결코아니다. 한마을 1 댁30여명 떼죽음 동촌· 장교마올 주민 70여영이 한날 한사에 죽음올 당해 지금도 음역 10월 26일 밤이연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느라 불이 환히 밝혀진다. 그들은 그틀의 부모 영제가 아무렌 까닭없이 죽임올 당했다는 사설 앞에 - 346 - 124